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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건너지 못하는 강 건너

생의 주사위는 던져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운명이건 숙명이건, 피할 수 있거나 피할 수 없거나 인생의 주사위는 던져진다.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 행복과 불행, 욕망과 좌절, 희망과 절망, 사랑과 이별, 축복과 저주,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인생의 길고도 짧은 희로애락의 강을 번갈아가며 건너간다.   순간의 차이로 명운이 갈라지고 운명의 수레바퀴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선택이 아니라 각본 없이 짜여인 원고지의 빈 칸을 채운다.   생명과 죽음을 판정하는 주사위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 모래시계의 마지막 한 알이 칠흙의 어둠으로 생명을 삼킬 때까지 눈 뜬 장님처럼 살아간다.   주사위 어원은 ‘제비뽑기’다. 영어로는 ‘Dice’인데 작은 상자 모양의 각면에 여섯가지의 점이 새겨져 있는데 바닥에 던져 윗면에 나온 수로 승부를 겨룬다. 인생의 패는 낙장불입(落張不入), 한 번 바닥에 놓아버린 패는 다시 무를 수 없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갈리아 원정을 함께 했던 군사들과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한다. 로마 공화국은 도시국가를 복속시킨 뒤 군사 지휘권을 가진 집정관이 해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자신이 이끌던 군단들을 루비콘 강에서 해산시키고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오게 했다.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 반란을 의미한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루비콘 강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단신으로 올 것을 요구했지만 그럴 경우 원로원에게 암살 당할 것임을 직시한 카이사르는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공화정을 종식시킨다.   라틴어 ‘rubico’는 형용사 ‘rubeus(붉다)에서 기원했는데 진흙 침전물에 의해 강물이 붉은 빛깔을 띠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루비콘강을 건너다.’라는 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 봉착했을 때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의 뜻으로 쓰인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루비콘 강을 건는다. 건너지 말아야 하고, 건너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나든다. 넘어서는 안 되는 산도 목숨 걸고 정복하고, 건너지 못하는 강, 건너서는 안 되는 위험한 강을 겁도 없이 건넌다.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앞날을 장담하지 못해도 순간의 유혹과 탐욕을 참지 못해 나락의 길로 들어선다. 조금만 견디면 해결될 일을 그 시간을 못 참아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넌다.   죽기 살기로 사랑을 맹세했던 사람과 결별하고 도원결의로 우정을 다짐하던 친구와 등을 돌린다. 동지가 황야의 무법자로 변해 서로 총을 겨누며 루비콘 강을 혼자 건너간다. 루비콘 강은 먼저 건너는 사람이 자살골을 넣는다. 죽고 사는 일 빼고는 생의 주사위는 언제든지 다시 던질 수 있다.   연어는 산란을 위해 귀향한다. 바위나 돌, 거센 물살에 찢겨 온몸엔 벌건 상처가 가득해도 거센 강물을 거슬러 목적지에 다다른 연어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마지막 사투를 벌인다. 오직 번식을 위한 힘겨운 여정의 막바지 임무를 완성한 연어들은 사체가 되어 자연으로 회귀한다.   그대여, 사는 것이 모질고 견디기 힘들어도 루비콘 강은 건너지 마요. 대신 강물에 헛된 부귀영화와 좌절, 고통과 슬픔을 떠나 보내세요. 루비콘 강은 죽음의 강입니다, 강 건너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지 버티며 살아 주세요.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주사위 어원 율리우스 카이사르 운명이건 숙명이건

2024-11-1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열정을 껴안고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 날밤 새는 줄 모르고 설쳐댄다. 요즘 눈만 뜨면 아들이 사 준 트레드밀에서 다람쥐처럼 뜀박질을 한다. 장가 가서 집에 다니러 온 아들이 다짜고짜로 끌고가 트레드밀을 구입했다.   물론 구입대금은 내 크레딧 카드로 긁었다. 그리곤 시간표를 만들어 놓고 운동을 시킨다. 지들 어릴 때 숙제 조사하듯 매일 체크를 해대니 안하고는 못배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자식이다. 범보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자식하고 맺은 약속이다. “오래 건강하게 살려면 운동해야 돼요. 엄마 일찍 죽으면 나 슬퍼해.” 아들의 이 한마디에 40년 동안 ‘운동 안 하고도 스트레스 안 받기 작전’으로 버티던 내 지조(?)가 와르르 무너졌다. 성가시게 보채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온다.   몸으로 떼우는 모든 것에 나는 젬병이다. 특히 운동에는 취미도 관심도 없다. 미식 축구 게임조차 잘 이해를 못하니 무식 정도가 아니라 푼수에 속한다.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산 골프채는 레슨만 두 번 받고 차고에서 휴식 중이다. 그래도 주눅 안들고 “난 운동 싫어서 안한다”고 오리발을 내밀며 오히려 큰소리치며 산다. 포기각서 쓰면 맨날 마음만 먹고 실천 못해 안달하는 사람보단 정신건강(?)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모를 때는 몰랐는데 해보니 진짜 운동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저 혼자 놀아도 즐겁고 봐주는 사람 없어도 신나는 게 운동이다.   신나면 재미있다. 신은 열정을 유발시킨다. 열정이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생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알면 자신을 바로 파악할 수 있어 열정이 생긴다. 마음은 콩밭에 있는데 보리밭에 가면 물에 물탄 듯 의기소침해지기 마련이다. 열정은 겉으로 들어난 것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 떠벌리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열정이라 할 수 없다. 떠벌리기는 겉으로 뿜어내는 거품이기 때문에 잘 사그러든다.   드러나지 않지만 차분한 열정을 가진 사람은 작은 물방울로 바윗돌을 뚫는다. 열정은 마음의 밑바닥에서 용솟음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영혼을 붙태우는 화염이고 생을 끌고가는 수레바퀴다. 찬물을 끼얹으면 의기소침해지고 풀이 죽어 마음에 병이 생긴다. 열정은 드릴 속의 배터리와 같다. 열정은 드릴처럼 삶에 구멍을 뚫어 신선한 바람이 불게 한다. 드릴을 사용할 때는 배터리 점검도 중요하지만 용도에 맞는 드릴척(drillbit)을 잘 골라야 된다.   분별 없는 열정은 에너지만 소진시킬 뿐 목표 달성에 걸림돌이 된다. 열정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타협해서 무너지면 열정이 아니라 오기였을 뿐이다. 오기는 벽에 부딫치면 부서지지만 열정은 벽을 넘고 산을 넘어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 인생이라는 동력선을 이끌게 한다.   왠지 의기소침하고 사는 게 시시하고 삶에 열정이 없다고요? 마음의 상자를 열어보고 제일 하고 싶은 것부터 순서대로 줄을 세우세요. 눈을 감고 한 손으로 맥을 짚고 다른 한 손을 심장에 얹어보세요. 살아있다는 이 작은 충만함으로도 당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그 일을 활화산처럼 불태울 열정이 다시금 용솟음치고 있지 않나요?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활화산 열정 맨날 마음 진짜 운동 배터리 점검

2024-11-1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추억의 항아리 껴안고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옆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중략)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 천양희 ‘오래된 가을’ 중에서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도 오늘도 떠나간다. 무성한 초록으로 아름드리 서 있던 나무들도 찬란한 옷을 벗고 하나 둘 흩어진다. 낙엽은 아침 이슬로 눈물을 감추고 밟힐 때마다 바스락 신음 소리 내며 작별을 서두른다. 계절은 등을 돌이며 빛바랜 정원에 추억의 꽃 씨 한 알 떨어트린다.     묵은 것들은 농익은 맛을 낸다. 상큼하진 않지만 감칠 맛으로 다가온다. 겉절이는 풋풋하고 신선한 맛을 내지만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다. 추억의 정원에는 오래 되고 빛이 바랜, 콤콤한 냄새 나는 해묵은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묵은지는 오래된 김장 김치로 양념을 강하지 않게 해 담근다. 저온에서 6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제 맛이 나는데 오래 숙성 저장 할수록 맛있고 깊은 맛을 낸다. 추억의 창고에 묵은지가 많은 사람의 하루는 가을 햇살처럼 따스하다. 묵은지는 일반 김장김치보다 조금 짜게 담궈야 긴 겨울을 버틴다. 인생의 짠 맛, 신 맛, 험한 맛을 많이 본 사람은 엄동설한을 버틸 힘과 용기를 얻는다.     너무 빨리 숙성된 김치는 금방 신맛이 나지만 묵은지는 서서히 오랜 기간 발효되기 때문에 시어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짧은 시간 한 방에 날리는 성공은 쉽게 사그러들지만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삶은 묵은지처럼 오래 지속된다. 묵은지 배추는 속이 덜 차고 푸른 잎이 많으며 단단한 것으로 골라야 한다. 사는 게 마음에 덜 차고 적게 가져도 늘 푸른 잎새로 마음 단단히 먹고 살면 묵은지처럼 깊은 맛을 낼 수있을까?     김장은 배추를 소금물에 담군다는 침장(沈藏)에서 나왔는데 김장으로 바뀌게 됐다.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유래됐는데 딤채→김채→김치로 변형을 거듭했다.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 땅에서 뽑힐 때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며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 돼 죽고,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마지막으로 죽는다. 김장 담그는 일은 다가올 험난한 엄동설한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이다. 익숙한 손 맛으로 오래된 정원에서 해묵은 추억의 불씨 하나 지피는 일이다. 난로가에서 톡 톡 튀는 밤톨 까먹던 유년의 시간으로 연어처럼 거슬러가는 일이다.   오늘이 허전한 그대여. 계절의 끝자락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그대여! 사무치게 그리운 날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묵은지로 남아있는 추억의 항아리를 꺼내 보세요. 못 견디게 힘든 날만 열어보세요. 너무 자주 열어 보면 그 아름답던 날들이 빨리 시어질지 몰라요. 추억의 항아리는 우거지로 단단히 덮어 땅 속 깊이 묻어 두세요. 찹쌀 풀 섞은 물에 고춧가루와 고추씨를 개고 멸치액젓 다진 마늘과 생강 소금을 넣듯 생의 모든 슬픔과 기쁨, 황홀한 추억들 모두 담아 꼭 꼭 봉해 묻어 두세요. 외로울 때면 오래된 정원에서 은근하게 잘 익은 묵은지 항아리 꺼내 빛바랜 어제를 이지러지게 껴안아 주세요.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항아리 추억 묵은지 항아리 일반 김장김치 추억들 모두

2024-11-0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 대신 작은 점 하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 낙엽은 흩날리지만 지축 향해 몸을 의탁한다. 떠나 와 세상 이곳 저곳을 떠돌아도 조국은 영원한 목숨줄이다. 살아있는 동안 외로운 영혼을 가누고 지탱하는 피에로의 안식처다. 피에로(Pierrot)는 다른 광대와는 달리 슬픈 얼굴로 분장을 한다. 얼굴에 분칠을 하며 립스틱 짙게 바르고 원뿔형 모자 쓰고 타국에서 어울려 사는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시간이 지나도, 세월이 흘러도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이 거세게 폭풍으로 몰아치고 먹고 사는 게 부대낄 때는 그리움은 둥지를 틀지 못한다. 텅 빈 가슴 속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속으로 흐느끼지만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무시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곡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성공이라 믿었다. 성공의 탑은 높이 쌓을수록 쉽게 허물어진다. 물질과 허영, 교만으로 생을 가득 채울 때는 비어 있는 것들의 평온과 기쁨을 알지 못했다. 가슴 뚫고 지나가는 세월의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어 있는 것들은 산사에 울리는 새벽 종소리로 가슴 저미며 울려 퍼진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작은 신음소리로 비어있는 공간 속으로 번져 나간다.   멀리 떠나와도 조국은 산수화의 여백으로 남는다. 품을 수 없어도 그리움으로 남는다. 비어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가슴으로 만질 수 있다.   동양화의 여백은 그냥 빈 것이 아니라 기(氣)의 표상이고 응축(凝縮)의 미학이다. 화가들은 ‘산수의 기상(山水氣象)’을 묘사하기 위해 여백을 남긴다. 여백은 광(光)과 기를 확대시키고 여운을 표현하는 훌륭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필선을 최소화한 감필과 절파화풍으로 표현을 억제하는 여운을 통해 여백은 광대한 공간을 암시하는 ‘여백의 미’를 창조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아는 것보다 추구하는 삶, 실용적인 것보다 가치있는 것. 여백은 비어 있는 아름다움의 세계로 생의 깊이를 탐구한다.   동양화를 그릴 때는 산수, 사람, 집을 최소한의 형태로 표현해 여백을 남기는데, 광활한 자연의 기운을 담기 위한 장치다. 형상은 사라지지만 내면이 풍성해지는 역설로 ‘비움’은 채워지지 못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영혼의 술래잡기는 없는 것을 찿으려는 구도자의 발걸음마다 새겨진 고뇌다.     ‘전화 걸면 날마다 /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 누구와 있냐고 또 별 일 없냐고 /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 묻고 또 묻는다 /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나태주의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그리움은 공백에서 헤어나오려는 존재의 부대낌이다. 보이지 않는 그대 사랑을 향해 부단히 추구하는 붓놀림이고 멈출수 없는 생의 몸부림이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강물처럼 흐를 때면 그리움은 무시로 떠다닌다. 둥지 튼 여백을 가슴 깊히 간직하면 진눈개비 내리는 날에도 그대 사랑은 따스하다.   죽음과 이별, 고난과 상처의 무게에 짓눌려 못질 하듯 오늘을 살아도 그리움으로 비워둔 화선지에 눈물 대신 작은 점 하나 찍는다.   그대 사랑은 비어 있는 하늘의 끝자락에서 펄럭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 눈물 대신 가슴 저미 새벽 종소리

2024-10-2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낙엽지고 눈 꽃 내리는 날엔

‘내 그대를 생각함은 /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 (중략)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중에서   과거는 흘러갔다. 울고 불고 뉘우치고 후회해도 과거는 까맣게 세월의 강 저편으로 떠나갔다. 과거는 아픈 상처로 할키고 지나갔지만 빛바랜 일기장 속에 한떨기 백합과 진홍빛 장미향기, 혹은 말린 나무잎새로 추억의 창고에 남는다.   큰 맘 먹고 수 년째 미루고 또 미뤘던 가족 사진첩과 비밀문서 박스 정리를 단행했다. 사는 게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으면(?) 이토록 뒤죽박죽 헝클어놓고 살았을까! 남들이 안 보기 천만다행이지 깔끔떨기로 유명한 얼굴에 먹칠 할 뻔했다.     애들 사진은 열심히 찍기만 하고 사진첩에 올라가 정리된 건 국민학교 때까지가 전부, 애들이 필요할 때 뽑아가서 이빨 빠진 째 미완성인 사진첩이 수두룩하다. 찌그러진 박스 비닐봉지에 담긴 사진들은 분리수거 하는데 수 일이 걸렸다.   오! 이 아름다운 과거로의 회귀. 하나 둘 사진을 정리하며 젊은(?) 느티나무가 돼 그 아름다운 순간들에 머물고 싶어 몸부림쳤다. 이렇게 젊고 행복한 날들이 있었구나! 까맣게 잊고 살았었다. 이토록 가슴 사무치게 아름다운 어제가 있었다는 걸. 순간이 영원이 되고 어제가 오늘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증표로 남겨두지 않았다면 마음의 창고 속 빛바랜 추억을 생생하게 짚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강 서둘러 안 챙기고 즐기며 끝낼 생각을 한다. 종목 별로 분류해 일단 좋은 사진은 스캔해서 컴퓨터에 저장한 뒤 CD로 구워 애들에게 보낼 생각이다.   비밀문서함은 가슴 떨려 뚜껑만 열어보고 곧장 닫았다. 그기엔 보고 싶은 사람들이 보낸 그리운 편지와 깨알 같은 사연들이 담겨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의식은 마음의 세계 중에서 대략 10%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 얄팍한 의식의 헷갈리는 작용으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며 산다.   ‘레몬 실험’은 마음의 작용과 상태가 신체적 생리적인 물리적 현상을 초래한다는 학설이다. 레몬을 생각하고 레몬의 색깔과 촉감, 레몬의 속, 그 냄새가 어떤지를 떠올리면 입 속에 침이 돌게 된다. 이처럼 무엇을 생각하면 마음이 가는 곳으로 에너지가 작용하고 이 에너지의 작용은 물리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마음 가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담은 그리움의 텔레파시가 작동한다. ‘추억 속 기행’은 세파에 지친 힘든 오늘을 추스리고 내일 향해 용기 잃지 말라는,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텔레파시의 의식이 아닐런지!   낙엽 흩날리고 눈 꽃 내리면 사랑의 편지를 쓰리라. 수취인 없어도 내일로 날아가는 편지를 쓰리라. 사랑이 꽃 피고 진다 해도 눈 꽃으로 살아남아 영롱하게 빛나는 어제를 기억하리라. 사철 따라 피고 지는 추억의 집짓기에 몰두하리라. 떠난 사람 때문에 울지 않으리. 다시 만날 사랑을 그리워하며 시공을 초월한 그대를 만날 때까지, 앞을 가로막는 오늘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리라. (윈드화랑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촉감 레몬 레몬 실험 가족 사진첩

2024-10-2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홀로 망루에 올라

‘바람은 세차고 하늘은 높은데 원숭이 슬픈 울음소리 들리고(風急天高猿嘯哀) / 푸른 강물 하얀 모래톱에 새들이 날아든다(渚淸沙白鳥飛廻). / 끝없이 늘어선 나무들은 우수수 낙엽을 떨구고(無邊落木蕭蕭下) / 장강은 쉬지 않고 도도하게 흘러온다(不盡長江滾滾來). / 만리 타향 쓸쓸한 가을에 이 몸은 항상 나그네 (萬里悲秋常作客) / 한평생 얻은 병을 안고 홀로 높은 대에 오른다. (艱難苦恨繁霜鬢) / 힘들고 어려운 세월에 흰머리 털 무성하고(艱難苦恨繁霜鬢) / 늙고 쇠약해져 이젠 술조차 끊어야 할 지경이다 (潦倒新停濁酒杯).’   두보(杜甫, 712-770)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칠언율시 ‘높은 臺에 올라’는 고향에서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기주에서 중양절을 맞은 두보가 병든 몸을 이끌고 혼자 높은 누각에 올라서 느끼는 감회를 읊은 시다.   중국 최고의 시인, 시성 두보는 이 시를 지을 즈음에는 폐병에 걸렸는데 여기서 보낸 2년간 동안 그가 남긴 1400여 작품 중 437수를 집필했다.   ‘만리비추(萬里悲秋)’는 만리 떨어진 타향에서 가을을 슬퍼한다는 말이다.     슬프지 않는 삶이 있으랴. 사계 중에 가을 바람은 유난히 심장을 뚫고 지나간다. 땅과 하늘을 무자비하게 초토와 시킨 허리케인도 가을이 오는 길을 막을 수 없다. 가을 바람에 우수수 잎이 진다. 단풍나무는 푸르고 높은 하늘 향해 작별의 손 흔들며 군데군데 붉은색 얼룩으로 잎새를 물들인다. 매끈하게 등이 굽은 고추는 립스틱을 짙게 바른 새색시처럼 잎새들 사이에 요염하게 숨어있다.   한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며칠째 잠을 설친다. ‘한강’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선하고 강단 있어보이는 여류작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부끄럽고 민망하다. “나의 소설 쓰기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란 말을 믿고 그녀의 소설을 열심히 읽고 공부할 생각이다.   2006년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작가 중에 노벨상수상자가 나오길 간절히 기대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황석영도 이문열도 아닌 여성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니, 말 많은 사람들의 시비는 분분하다.     흘러간 물로는 배를 띄울 수도 없고 새 역사를 쓸 수 없다.   젊은 시절 한 때 이문열 작가의 작품에 몰두했다.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젊은 날의 초상‘ ‘영웅시대’ ‘금시조’를 읽으며 한국작가의 노벨상을 꿈꾸었고 ‘레테의 연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가 출간되고부터 기대를 접었다.   사무치던 젊은 날의 가난과 한풀이 하듯 삼국지로 번 거금으로 부악문원을 짓고 고향에 ‘이문열 기념관’의 다른 이름 ‘광산(匡山) 문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글쓰기를 제외한 모든 활동은 소모이고 악재일 뿐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번역 출간 되었지만 미국에서의 반응은 미미했다.   언제부터인가 망루에 혼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망루는 방어용 감시용으로 지은 전망대다. 대학 은사님, 선배 작가, 어른들 소식 알기가 두려워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는다. 신장암 수술 후 3~4년간 투병, 치매 경고 받아 명사 찾기가 힘들다는 이문열 기사를 읽는다.     ‘새는 죽을 때 그 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 장편소설 ‘황제를 위하여’에 나오는 멋진 문구다. 선하게 살다 착하게 죽는 것은 축복이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망루 노벨문학상 수상 가을 바람 만리 타향

2024-10-1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어리석은 자의 변명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매일 걱정하며 산다. 생각나는 가능성을 콩알처럼 펼쳐 놓고 지레 걱정하며 산다. 혹시 사고가 나지 않을까, 넘어져 다치지나 않을까, 애들은 잘 지내는지, 신용카드를 누가 도용하지 않았을까, 잔고가 엄청난 것도 아닌데 누가 빼갔나 확인하고, 혹시 스팸 이멜에 속아 넘어갈까 걱정이 태산이다.   뒷마당에 누렇게 잎이 마른 나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걱정이고, 허리케인에 옆으로 쓰러진 코스모스는 씨는 언제 받나 애가 탄다. 가을 바람에 풍성하게 자란 채소들은 시들기 전 빨리 먹어야 해서 안절부절이다.     세상에 마음 편하게 굴러 가는 것은 없다. 열심히 걱정한다고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지 않는다.     내게 가장 약한 고리는 참을성이 없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고 피상적인 것, 겉으로 드러난 것에 즉각 몰두한다. 피상적 매력(Superficial charm)에 필이 꽂히면 물 불 안 가리고 덤벼들어 사고 칠 확률이 높아진다.   어릴 땐 생각에 몰두해 앞을 안 보다가 넘어져 무릎 성한 날이 없었다. 나이 들면서 운명적인 만남에 목숨 걸었지만 제대로 된 사랑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돈키호테식 발상, ‘예술가적 방랑끼’라고 치부 하기에는 청춘시절의 기록은 변명의 여지없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이 쓴 대화편 중 하나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들을 철학적 입장에서 변론한다. 자신이 신을 밎지 않는다는 혐의에 대해 “신탁(Delphi Oracle)이 자신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했다”며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지 않은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깨달았으며, ‘자신이 아는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주장한다. 젊은이들을 부패시켰다는 혐의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랐으며 진리를 추구하도록 격려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은 두려워 할 일이 아니며 죽음은 무의식 상태거나 다른 세계로의 이동일 수 있으며, 어느 쪽이든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한다.   제자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법이 부당하게 느껴질지라도 시민으로서 법을 따를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직전 마지막 대화를 기록했는데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일 뿐 철학자는 죽음을 준비하고 탐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있다. 지혜로운 자는 할 말이 있을 때 말을 하고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한다. 어리석은 자는 잘못을 잘못인 줄 모르고, 잘못인 줄 깨달아도, 누가 알려주어도 고치지 않는다.   후회는 어리석은 자의 변명이다. 인생은 체념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체념은 포기하고 방관하는 것이고 극복은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제일 잘 안다. 쓸 데 없는 일에 목숨 걸다 자빠지고, 꼭 해야 할 일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다 때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산다.   어릴 적 줄넘기를 할 때 늘 걸려 넘어졌다. 땅에 줄이 닿는 순간을 포착해 힘차게 뜀박질 해도 소용없었다. 줄이 땅에 닿기 전에 공중으로 몸을 날려야 하는 것을.   이젠 줄넘기를 하지 않는다. 남이 던지는 줄에 걸려 쓰러지지 않는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자의 변명은 끝이 없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변명 자의 변명 돈키호테식 발상 죽음 직전

2024-10-0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죽을 힘을 다해 산다

있다가 없어지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처음부터 없이 살면 힘든 지 모른다. 사랑도 불태우다 꺼지면 재가 되지만 사랑을 안 해본 사람은 그냥 그렇다. 원래 내 것이 아닌 것들은 남의 것이다. 내 손에 없다고 한탄 해도 소용없다.   세상에 이런 일이!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여파로 비와 강풍이 몰아쳐 16시간 지속되는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먹거리가 쌓여 있는 냉장고와 냉동실은 음식이 상할까 봐 문 안 열기 작전으로 버티며 하루 종일 라면 끓여먹고 연명했다.   허리케인 ‘헐린’이 미국 남부 멕시코만 해안 지역을 강타하면서 곳곳에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허리케인(Hurricane)은 대서양 서부•카리브 해•멕시코 만이나 북태평양 동부에서 발생하는 강한 열대 저기압으로 태풍처럼 강한 바람과 많은 비를 동반한다. 이번에 미국을 강타한 헐린의 경우 시속 241㎞ 강풍을 동반해 최소 14명이 사망하고 60만여 가구가 정전 피해를 봤다.   허리케인이 미 중서부를 강타할 확률이 낮아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내다 혼 줄이 났다. 한풀 꺾이자 ‘산 사람은 먹어야 산다’며 김치찌게를 끓여 주린 배를 채운다.   정전(Power outage)이 발생하면 적막강산!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인터넷이 끊기고 텔레비전 유튜브 불통으로 모든 것이 깜깜해진다. 손전등 찿아 화장실과 긴급 상황 발생할 곳에 촛불을 배치했다. 반나절은 인내심 테스트 하며 버텼는데 해가 기울자 불안 초조 공포가 밀려온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삼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 건 국민학교 입학할 즈음이다. 어둑어둑 해가 지면 대나무 평상에 누워 별을 헤다가 옥이 언니가 꾸며낸 이야기 들으며 잠이 들었다.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자리에 드는 생체 리듬에 온 마을 사람들이 충실했다.   폭우가 지나가길 학수고대하다 지쳐서 각박할 때 용기를 주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기로 한다. 딸 졸업 선물로 간 파리여행 때 마레(Marais) 지구에 있는 빅토르 위고의 집을 방문했다. 사랑, 용기, 희생, 인간 본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며 서양 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소설로 평가받는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을 이 곳에서 집필했다.   1851년 12월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1873)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인사로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했다. 이 망명기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이 있는 때였고 파리에 돌아온 후 발표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 시기에 집필됐다.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헌신과 사랑을 담은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은 200여 나라에서 출간됐다. 불멸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시대를 정의하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소설은 역사는 무엇이며, 누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누구에게 일어나며, 개인은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묻고 있다. ‘그는 잠자네. 비록 그의 운명이 기구했지만 그는 살았네. 자기의 천사가 없어지자 그는 죽었네. 올 일은 오고야 말았네. 마치 낮이 지나 밤이 오듯이.’ 비와 먼지로 퇴색한 주인공 장발장의 묘비에 적힌 4행시로 레 미제라블은 끝을 맺는다.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낡은 전등의 가는 철사줄이 아니라 ‘태양으로 연결된 빛’이라는 생각을 한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리케인 여파 빅토르 위고의 사랑 용기

2024-10-01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슬픔과 고통 속에 빛나는 태양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어떤 것에 몹시 놀란 사람은 비슷한 사물만 보아도 겁을 낸다. 내가 끔찍이 싫어하는 건 지렁이 뱀 등 땅에 기어다니는 환형동물이다. 마른 나무가지나 꾸부정한 실 꽁지만 봐도 기겁하고 놀란다.   현풍 할매 곰탕으로 소문난 읍내에서 한 정거장을 더 가면 초갓집이 버섯처럼 옹기종기 붙은 삼거리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좁은 논두렁 따라 갈매기처럼 줄지어 갈 때는 등에 매달린 보자기 속에서 양은 도시락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다들 냅다 잘 내빼고 달리기도 잘 하는데 난 왜 항상 꼴찌였을까. 한 여름을 달군 땡볕이 뺨을 빨갛게 달구던 오후, 촐랑촐랑 딴 생각하며 집으로 오는 길에 뭔가 미끄덩하는 순간 나자빠졌는데 논두렁에 똬리 튼 뱀을 밟은 것.   엄마 등에 업혀 집에 왔는데 밤새 “뱀 잡자” 헛소리를 하고 앓았다. 기억은 몽롱 하지만 스르르 몸을 풀며 논으로 들어가는 뱀을 본 것 같다. 지금도 뱀 그림만 봐도 소름이 끼치고 지렁이나 땅에 기는 것들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공포증(Phobia)은 불안장애의 한 요인으로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공포증을 느껴 오한 발열 경련 어지러움 두근거림 구역질 등의 증상을 나타낸다.   타나토포비아(Thanatophobia)는 죽음에 대한 공포증, 자신 또는 주변 인물의 죽음과 존재의 상실에 대한 공포를 말한다. 죽음만큼 더 고통스러운 기억은 없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 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뭉크가 1892년 1월에 남긴 ‘절규’에 관한 글이다. ‘절규’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정신병원 근처 바닷가 길로 정신질환으로 입원해 있던 뭉크의 누이동생 로라 카트린느를 만나기 위해 드나들었던 정신병원으로 가는 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의 명성에 비해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는 오슬로 시 소재 뭉크 미술관에서 핏빛 하늘과 불타는 구름, ‘절규’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얼마나 더 큰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절규하며 공포에 시달려야 생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를 근심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국민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생과 죽음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담은 표현주의 화가의 선구자로 꼽힌다.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고 고백할 만큼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을 안고 산다. 5살 때 결핵으로 어머니와 사별하고 9년 후 사랑하는 누이 소피가 죽고 뭉크도 결핵에 걸려 죽음의 공포와 망상에 시달린다.   정신병원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는 동안 뭉크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고 큰 충격과 위로를 받고 노르웨이의 자부심이 된 ‘태양(1911년, 캔버스에 오일, 455x780cm, 오슬로대학교 소장) 시리즈을 제작한다. 오슬로대학 창립 100주년을 맞아 그린 대형 벽화 ‘태양’은 노르웨이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뭉크의 얼굴이 그려진 노르웨이 화폐 1000 크로네의 뒷면을 장식한다.   불안과 우울함이라는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생명과 희망의 빛을 포기하지 않았던 뭉크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노래한다. 슬픔과 고통 대신 눈부신 희망을 담아낸 뭉크의 태양처럼 내일은 내일의 찬란한 태양이 또 다시 떠오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고통 태양 공포증 자신 에드바르 뭉크 오슬로대학교 소장

2024-09-24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하루 한 뼘씩 자라는 잎새들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 각종 모종 얻어 심은 한국 고추가 풍성하게 매달렸다. 요리책에 ‘홍고추’로 고명을 얹으라 해서 내년엔 빨간색 고추 모종 구해달라고 어르신께 부탁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요. 초록색 고추가 빨갛게 익을테니.” 웃으시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에! 초록색 고추가 하나 둘 빨강색으로 물들었다.   올 여름 유기농 채소 가꾸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른다. 한인 어르신, 이웃 아저씨, 인터넷 뒤지며 연구에 몰두한다. 배우는 것만큼 기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는 것이 힘이다, 먹어야 산다’를 열창하며 그동안 아는 체하며 까불었던 과거에 고개 숙인다. 애들 키우며 사업하느라 발뒷꿈치가 갈라 터지도록 이리 뛰고 저리 달리느라 ‘흙 밟아 본 적이 없다’는 나의 처절한 변명.   근동에서 땅 부자로 소문난 아버지는 내가 두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논 밭에 나가 본 적이 없던 어머니는 그 때부터 혼신을 다해 농사일에 매달렸다. 머슴이고 집사인 삼만이 아재와 농사꾼들과 함께 하루 종일 밭고랑을 매고 풀을 뽑았다.   유년의 기억 속 어머니는 하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무명 소복을 입고 있다. 옥이언니 등에 업혀 밭고랑을 오락가락 하다가 칭얼대면 언니는 핑크색에 동백 꽃무늬가 새겨진 박음질이 촘촘한 포대기를 풀고 어머니 품에 날 내렸다. 어머니 가슴을 비집고 젖줄이 곤고한 젖무덤을 더듬으면 황토색 흙냄새가 스며 들었다.   “현풍댁은 저리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 일꾼들만 부려도 잘 먹고 살텐데.” 동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어머니 오른쪽 손목은 모진 호미질로 휘어졌다. 땅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삶의 터전이지만 남매의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이였다. 어쩌면 어머니는 청상과부의 한많은 아픔을 매일 땅 속에 묻고 있었는지 모른다.   ‘애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큰다’며 대청마루 기둥에 어머니는 숯덩이로 금을 그어 키를 쟀다. 자식들이 흙에서 돋은 채소처럼 푸릇푸릇 건강하게 자라 땅 속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수양버들로 살아남기를 바랬다.   정말이지 텃밭의 채소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란다. ‘호박꽃도 꽃인가’란 염려는 무식의 대참사다. 다섯 손가락 벌린 채 관능적으로 굽은 연노란 꽃잎을 밀어내고 매끄럽고 반질반질한 호박이 달린다. 조롱조롱 매달린 방울 토마토는 물주며 군것질 하듯 따먹고 삼만이 아재 주먹처럼 단단한 토마토는 너무 열심히 먹어서 얼굴이 빨게질까 걱정이다. 지중해식단에 몰입해 올리브오일 듬뿍 부어 오븐에 구워 얼리면 겨울내 양식이 된다. 소금에 살짝 간 한 가지는 구워 얼린 뒤 토마토 소스에 마쯔렐라 치즈 뿌려 오븐에 구워내면 멋진 이태리 요리가 된다.   어머니 생전에는 손가락 까딱 안하고 차려주신 음식을 잘 먹었다. 도와드리는 척 폼 잡다가 흡입식으로 퍼먹고 ‘피곤할 텐데 쉬어라’는 말 떨어지기 무섭게 소파에 늘부러졌다. 당신이 떠나면 ‘뭘 해 먹고 사나’ 걱정 되신 어머니는 요리 잘하는 분에게 요리 비법을 전수시키며 딸의 안위를 신신당부 했는데 파토가 났다.   추석이다. 갖은 나물과 전 부쳐 지인들과 나눠 먹던 엄마 생각에 콧등이 찡하다. 궁하면 통한다. 슬픔을 거두고 약식과 감주 만들어 친구들과 먹을 생각을 한다. 음식을 니눠먹는 것은 사랑의 향기를 가슴에 담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 게으름 안 피우고 살게 되기를. 땅을 친구 삼아 머리 숙이는 일에 익숙해지면, 훗날 지구를 향해 홀가분하게 작별의 손 흔들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잎새들 어머니 가슴 어머니 생전 어머니 오른쪽

2024-09-1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떠나는 시간 붙잡고 울지 말기

시간은 고무줄이다. 늘어나고 줄어든다. 하루를 일년처럼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년을 하는 일 없이 지루하게 허송세월로 보내기도 한다. 허송세월(虛送歲月)은 가치 있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모습을 말한다.   시계 추는 다른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추가 좌우로 흔들림에 따라 일정한 속도로 태엽이 풀리며 시곗바늘이 움직인다.   ‘특별한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아침부터 밀려오는 하루의 시작(중략)/ 평범하게 씻고 평범한 식사를 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침이 지나가면(중략)/ 똑딱거리는 시곗바늘에 맞춰/ 시계추마냥 왔다갔다 하는 하루들/ 하루가 모여 한달, 일년을 넘어가면/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걸까’-유니의 ‘시계추’ 중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매달려 인생의 시계는 돈다. 인생의 시계는 수동이다. 멈추지 않게 하려면 태엽을 감든지 베터리를 갈아끼워야 한다. 매일 새벽 4시, 캄캄한 어둠을 뚫고 하루를 맞는다. 눈 여겨 보는 이 없어도 밤새 어둠 속에서 홀로 반짝이던 새벽별과 작별하고, 제일 먼저 가슴 스치는 바람과 악수한다. 어둠에 묻힌 잔디는 작은 진주알 같은 이슬을 품고 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는, 정갈하고도 고요한 하루의 시작에 가슴 떨린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왠 수다냐고? ‘나이 들면 새벽에 깬다’며 아들은 나의 새벽 세러모니를 평가절하 한다. ‘나쁜 놈, 저도 늙어봐라.’ 하려다가 늦잠꾸러기로 어머니 애간장 태우고 지각 밥 먹듯 하며 벌 서던 생각이 나서 히죽이 웃는다.   절실하면 이루어진다. 성격은 바꾸기 힘들지만 버릇은 길들이기에 달렸다. 화랑과 창작예술센터 운영하고 아이 셋 건사하다 보면 해뜨고 질 때까지 내 시간은 일 분도 허락되지 않았다. 애들이 깊은 잠에 빠진 새벽이 유일한 피신처요 탈출구였다. 그 때부터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내 ‘새벽 동화’가 시작된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고통과 권태를 견디고 영롱한 새벽별 보고 폭풍이 지나간 하늘에 뜬 무지개를 만나는 사람은 슬퍼도 울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편한데로 세상을 본다. 자기 생각대로 옳고 그름, 좋고 나쁨, 길고 짧음을 판단한다. 마음은 변덕쟁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는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힘든 시간은 유난히 느리게 흐른다.   한국행 비행 시간은 왜 그리 느리게 가는지. 아이폰 꺼내 보고 또 꺼내 봐도 병아리 눈물만큼 움직인다. 한국에 있는 시간은 번개처럼 지나간다. 옛 동무나 지인 만나 동대문에서 갈치솥밥, 냄비우동, 꼬마김밥. 옛날 짜장면, 추억의 오뎅국물 즐기며 먹방투어 하다보면 날벼락처럼 휘가닥 시간이 달아난다.   ‘동짓달 기니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시는 밤 꺼내고 싶은 황진이 사랑은 에로틱하며 서정적이다.   사랑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시간은 흘러간다. 안 하는 것보다 시작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을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시작할 지 고민이면 지금 시작하면 된다. 시작의 종창역은 끝이 아니다.   쓰러지고 무너져도 떠나는 시간 붙잡고 울지 않기를.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시간 동안 시간 새벽 세러모니 허송세월로 보내기

2024-09-1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영원한 사랑은 짧다

찬란한 순간은 무너져도 다시 돌아온다. 사랑은 기억의 강가에 작은 별로 반짝인다. 은하수를 본 적이 언제였던가. 날개 부러진 새들처럼 추억은 허공에서 퍼득인다. 참 많은 것들이 떠나갔다. 피흘리며 투쟁하던 젊음, 사랑, 청춘, 욕망, 이별, 절망들이 세월따라 흘러가도 남은 소중한 것들 위해 옷깃을 여민다. 되돌릴 수는 없지만 사랑의 흔적은 화석이나 작은 뼈마디로 남는다.   1879년 에스파냐 북부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된 구석기 후기의 벽화는 동굴 벽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벽면의 오목하고 볼록한 부분에 빨강과 검정의 농담(濃淡)으로 입체감을 내고 점묘법을 사용해 27마리의 들소 떼가 사슴, 말 등과 함께 채색돼 있다. 사냥감이 많이 잡히기를 기원하는 크로마뇽인들의 주술적 행위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담아 원시와 현대를 괸통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다나우스 왕은 신탁에서 사위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예언을 듣고 50명의 딸들에게 첫날 밤이 지나면 남편을 죽이라고 명한다. 다른 딸들은 모두 남편을 죽였는데 다나이드만 불복해서 그 죄로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퍼 나르는 형벌을 받는다.   1885년 오귀스트 로댕은 ‘지옥의 문’을 구상하면서 로댕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답게 여체를 표현한 ‘다나이드(Danaid)’를 조각한다. 슬픔과 절망, 파도 속에서 쓸려 내리는 듯한 실크 같은 머리결, 관능적인 여인의 등 곡선은 고통 속에서 섬짓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였던 카미유 클로델이 다나이드의 모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로댕은 ‘옷을 벗은 여성, 그 얼마나 위대한가! 마치 구름을 뚫고 빛을 비추는 해와 같다. … 모든 모델 안에는 자연이 그대로 존재한다.’라며 모델의 아름다움을 격찬한다.   클로델은 19살에 로댕을 만나 24살 나이를 극복하고 사랑에 빠진다. 조각가로 솜씨가 뛰어났는데 대리석을 유리처럼 매끄럽게 조각한 기교를 보면 다나이드를 클로델이 직접 조각했다는 주장도 있다. 로댕은 그녀의 탁월한 재능에 감탄했지만 클로델이 살롱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견제하기 시작한다.   예술적 경쟁자와 연인, 로댕의 뮤즈이자 조수이고 모델이였던 클로델은 대등한 한 사람의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로댕을 사랑한 죄로 비운의 삶을 산다.   로댕이 조각가로서 대성공을 거두는데 비해 카르델은 16년을 연인이자 예술의 동반자였던 로댕과 결별 후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궁핍한 삶과 절망 속에 허덕인다. 빌에브라르 정신 병원에 수용돼 30년 동안 바깥 출입을 금지 당하는 유폐 생활을 하다가 무연고자로 공동 매장 된다. 불행하지만 당당하게 삶을 살아간 카르텔은 ‘창조와 파괴의 여신’으로 현대 미술계에 재조명된다.   사랑은 독약에 꿀을 바른다. 미치거나 꼭지가 돌면 눈먼 사랑의 유혹에 빠진다. 예술은 불변해도 인간은 변한다. 사랑은 휘파람 소리나 작은 돌팔매질에도 부서지고 깨진다. 사랑은 작은 비누방울을 공중에 부는 일이다. 햇볕 속에서 오색 무지개로 떠오르지만 추락하면 사라진다. 사랑은 환상이다. 깨어나도 흔적은 남는다. 비바람 몰아치는 상처도 동굴의 벽화나 화석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사랑은 짧고 예술은 길다. 사랑이 한 순간의 착각이라 해도 그 짧은 기억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꿈꾼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영원 사랑 젊음 사랑 연인 로댕 오귀스트 로댕

2024-09-0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시대를 비추는 영원한 거울

나는 내 인생의 아이콘이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유일하고도 독보적인 존재다. 신기술이나 발명품, 창의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사람도 결국은 인간이다. 사람이 시대의 아이콘을 만들어내고, 사람이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생의 굴레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며 버텨온 모습을 들여다본다. 구겨져도 다시 펴기를 반복하는 형상이 안쓰럽다.   원래 아이콘(Icon)은 상(像), 초상, 형상 등을 뜻하는데 그리스도교의 성상, 성화를 말한다. 어떠한 분야에서 우상으로 떠받들어지거나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 특정한 사상이나 생활방식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아이콘 난무시대다. 별에 별것에 아이콘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아이돌(Idol)도 마찬가지다. 자고 나면 새로운 아이돌(Idol)이 등장해서 머리가 헷갈린다. 아이돌(Idol)은 우상(偶像)적인 존재라는 뜻으로 ‘매우 인기있는 사람’을 말한다.   우상은 영광과 댓가를 치른다. 찬란한 조명 뒤에는 참혹한 어둠이 존재한다. 대중은 잔인하다. 달면 마시고 쓰면 버린다. 진실을 이겨내는 소문은 없다. 사람이 사람값을 매기고, 시대가 아이콘을 양산하고 허수아비 아이돌을 만든다.   시대는 변화한다. 역사의 물줄기는 느리지만 빠르게, 돌풍처럼 소용돌이 친다.   산업혁명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전으로 꼽힌다. 18세기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차를 발명하면서 1차 산업혁명이 촉발된다. 2차 산업혁명은 토마스 에디슨이 전기 백열등을 발명해 수공업과 제조업을 기계적인 산업 구조로 재편한다. 3차 산업혁명은 20세기 후반 컴퓨터와 인터넷 보급으로 정보 처리와 전달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4차 산업혁명을 연결하는 모바일 혁명으로 AI, 인터넷, 빅데이트 등의 문화혁명으로 번질 조짐이다.   AI(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가 인간의 지능인 학습, 추리, 적응, 논증의 기능을 갖추면 세대별 소통이 더욱 힘들어지고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산업혁명이 위대한 발전이라 해도 더 큰 변화와 혁신이 발생하면 퇴색한다. 증기기관차는 라이트 형제가 만든 비행기의 위력을 능가하지 못한다. 영국을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 화가 중 한명인 윌리엄 터너는 초기 기차의 역동적인 모습을 캔버스에 담는다. 화가들은 이젤과 화구를 들고 멀리 가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증기기관차는 실내나 정원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화가들이 먼 곳까지 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   모네가 ‘인상-일출’ 등으로 인상파 전시회를 열자 바평가들은 ‘불쌍한 장님들, 안개 낀 풍경을 너무 선명하게 그렸군’이라며 조롱했다. 모네는 안개를 그림으로 보여주기 위해 ‘생 라자르 역(La Gare St, Lazare)’ 연작 12점을 그린다. 유리 지붕으로 구름처럼 서리는 연기 사이로 흘러드는 빛의 효과와 기차가 내뿜는 증기에 사물의 형체가 흐려지는 것을 안개처럼 표현한다.   예술은 시대를 앞서간다. 시대를 이끄는 동력이고 미래를 향해 달리는 수레바퀴다. 그림은 시대의 초상이다. 시대를 포옹하고 미래로 나간다. 화가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대의 자화상을 그린다. 비록 인정 받지 못하고 실망과 좌절로 허우적거려도 창조의 불길로 시대를 넘나들며 영원한 우상으로 남는다.   생의 불꽃을 뜨거운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아이콘이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비추 영원 허수아비 아이돌 인터넷 보급 인상파 전시회

2024-08-2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죽지 못해 산다고 해도

눈물이 난다. 자꾸 난다. 요즘 자주 눈물을 흘린다. 오래 말라있던 눈물샘이한꺼번에 용솟음치는 걸까. 소소한 일에도 가슴 떨리고 작은 일에도 감동 받는다.   그동안 내 인생과 전혀 상관없이 지나친 일들이 내 일처럼 마음이 쓰라린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는 죽을 수가 없어 산다. 남편은 대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일곱살 정도 정신연령을 가진, 스무살이나 나이 어린 여자를 후실로 데려오고 세상을 떠난다. 할머니는 둘째 부인이 낳은 자식 셋 뒷바라지 하며 장애를 가진 둘째 부인을 친 자매처럼 돌본다. ‘오래 살아야지. 내가 죽으면 둘째는 누가 돌보겠노.’ 그 대목에서 눈물이 쏱아져 휴지로 코를 풀었다. 가난에 찌든 시골 살림의 가장이 되어 억척 같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할머니 인생은 감동을 준다.   가난하지만 착실한 구두세공 세묜은 외상값을 받아 그동안 아내와 돌려입던 외출용 털외투를 장만하려고 마음 먹는데 뜻대로 안 된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화가 난 세묜은 보드카를 마시고 돌아오면서 알몸으로 떨고 있는 사람이 불쌍해 집으로 데려온다. ‘살려면 일을 해야 된다’며 미하일에게 구두 수선공 일을 가르친다. 톨스토이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도입 부분이다.   어느 날 오만한 부자가 일년이 지나도 모양이 안 변하고 실밥이 터지지 않는 고급장화를 주문하면서 실패하면 감옥에 넣겠다고 협박한다. 왠지 미하일은 멋진장화 대신 슬리퍼용 실로 신을 만든다. 세묜이 대경실색 하는데 그 때 부자의 시종이 황급히 와서 장화 대신 망자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바꾼다. 부자가 집으로 가는 길에 죽은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한 치 앞도 모른다. 원래 미하일은 하나님을 모시던 대천사였는데 가련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라는 명령에 불복해 지상으로 내동댕이 쳐진다. 미하일은 남편이 죽고 갓 태어난 아이둘이 클 때까지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여인의 목숨을 거둘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톨스토이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고,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우리는 왜 사는 지, 무엇 때문에 사는 지 모르고 산다. 사는 게 만만치 않아서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죽지 못해 사는 걸까 살기 위해 죽지 못하는 것일까.   고통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 눈물을 닦아주고 아파해 주지만 내 짐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고통과 절망은 모난 돌뿌리처럼 생의 곳곳에 지뢰로 숨어 있다.   맨발로 걸어가면 발바닥이 덜 아프겠지만 멋진 장화를 신었다고 피해가지 못한다. 인생의 환희와 절망, 고통과 가쁨을 번갈아 마주하며 산다.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이유도 모른 체 산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죽지 않고 산다.   남은 날이 살아온 시간보다 적다 해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길이에 연연하지 않고 시간의 바구니에 담을 일기장을 채울 생각을 한다. 손잡고 서로 띠를 만들거나 홀로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본다. 별자리 이름을 다 까먹었다.   아름드리 핀 코스모스 향기 맡으며 새벽의 문을 연다. 이토록 소중한, 멈출 수 없는 시간 속에 살아있다는 경이로운 축복에 목이 메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할머니 인생 절망 고통 멋진장화 대신

2024-08-2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변하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계절이 바뀌듯 사람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화와 소멸은 모든 만물의 법칙이다. 소멸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을 통해 인류는 진화하고 성장하고 존재한다.   생성(生成, Becoming)은 사물이 생겨나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사물을 생기게 하는 것을 말한다. 철학적으로는 새롭게 출현하고 사라진다는 의미의 변화를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이 거듭되며 변화하는 것 중에서 변하지 않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 그리스 철학이고 서양 철학의 시작이다.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는 그것을 ‘물’이라 했고 데모크리스토스는 ‘원자’라고 했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고 했는데 아이디어(Idea)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한다. 세상 만물을 그것이 그것으로 해주는 본질을 전지전능한 유일신으로 보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사람은 같은 강물에 몸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어록은 인생의 제한적인 유한성을 의미한다.   그 때 그시절 그 아름답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흐르던 강물에 두 발 담그고 손가락 걸며 사랑을 맹세했던, 새하얀 얼굴의 남학생은 어느 하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 지 알 길이 없다. 다시 만나면 서로 알아볼 수 없다 해도 가슴 속에 담았던 사랑의 언어들은 여전히 따스하고 유효하다.   강물은 평지에서는 천천히 흐르지만 구비를 돌고 돌며 속도를 내고 절벽을 만나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폭포 되어 갈갈이 부서져 흩어진다.   ‘죽어도 못한다’는 사람은 아직 안 죽어봐서 그런 소리를 한다. 죽는 것 빼고는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소멸이 아니라 소멸 뒤에 오는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히는 공포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지켜본 플라톤은 육체는 언젠가 소멸하지만 영혼은 불멸한다고 믿었다. 죽으면 이승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다음 세상이 결정되는데 선한 사람은 더 나은 환경에서, 악한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육체를 안고 살게 된다. 그는 ‘삶은 육체 안에 갇힌 영혼의 감금 생활이요,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해방이자 분리’라고 설명한다. 금욕과 절제로 영혼을 깨끗이 정화하면 육체에 감금 되지 않고 행복한 세상으로 옮겨 간다고 설명한다.     죽음을 기억하면,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서 상처와 고뇌를 흘려보낼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내가 사는 방법이다. 사는 것이 두렵고 죽음의 공포가 땅거미로 밀려와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껴안고 치열하게 살 생각을 한다.   폭풍이 부는 날은 나무들도 가지를 꺾는다. 찬란했던 잎새들이 하나 둘 떠날 무렵 마지말 한 잎이 떨어질 때 나무는 마른 손 비비며 작은 신음 소리를 낸다.   뭉크의 ‘절규(The Scream)’처럼 죽음의 환상에 떨지 않고 살아있는 기쁨으로 내일을 다잡을 궁리를 한다.   무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의 꽁무니에서 아침 저녁으로 가을 냄새를 맡는다.   가을이 오면 오색 찬란한 단풍으로 물든 오솔길을 혼자서 걷고, 겨울엔 목화꽃처럼 펑펑 내리는 눈을 쓸어안고 가슴 적시는 시를 쓰리라. 억겁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리라.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서양 철학 생성 becoming 감금 생활

2024-08-1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성공신화와 파멸의 꽃

성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내가 성공했다고 말한다. 나는 정말 성공한 사람인가. 성공의 척도는 무엇일까. 나는 쉬지 않고 달려왔을 뿐이다. 어떤 난관에도 실망하지 않았고 멈출 수가 없어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 자전 에세이가 출간되고 주요 일간지와 잡지사 인터뷰가 쇄도했다. ‘다운증후군 딸과 영재 아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을 모두 겪고 미국 상류사회의 예술가이자 사업가로 우뚝 선 한국여자 이기희’란 타이틀로 졸지에 유명세를 탔고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아침마당’ 출연은 광고까지 나갔는데 불발됐다. 화랑 대표로 사업하는 화려한(?) 모습이 주부들이 주로 시청하는 프로그램에 위축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   다운증후군 장애아 딸과 출연해 운명을 극복한 어머니를 조명하는 걸로 컨셉 변경을 제안했지만 딸 인생을 팔아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람들은 성공신화를 즐긴다. 사는 것이 힘들고, 물에 물 탄 듯 지루해서일까.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눈물 흘리며 자신의 아픔을 위로 받는다.   성공담의 주인공은 참혹한 비극과 몰락에 빠지지만 오색찬란하게 장식한 생일 케익의 겉모습처럼 달콤하고 화려하게 부활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가 집필한 세계 명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스무살이나 나이 많고 도덕적 원칙주의자와 결혼한 안나는 완벽해 보이지만 자유를 속박하는 족쇄와 다름 없는 결혼생활은 한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안나 카레니나는 기차역에서 젊고 잘생긴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름다운 유부녀와 잘생긴 청년의 분륜이 시작된다. 사회규범을 어기며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카레니나는 충실하려 했지만 사회로부터 배척 당하며 고립된다.   안나의 사랑은 집착이 되고 결국 브론스키에게 거부당한다.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것을 보아도 소름이 끼치게 된다면 촛불을 꺼버려도 되지 않을까.’ 질투와 집착으로 범벅된 자신의 사랑이 끝나는 것을 감지한 안나는 브론스키를 처음 만났던 기차역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톨스토이는 어떻게 후회없이 살 것인가를 평생 고민했던 사람이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길’에서 ‘인간은 성찰과 학습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한다. 성장은 과정이다’라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다’라고 적고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 ‘무엇’ 때문에 행복해진 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꾸준히 길을 찿아 행복에 이른다. 행복은 표지판이 없는 길찿기다.   성공은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는 것이고 성취는 성장을 통해 도달하는 길이다.   성장은 미숙한 존재에서 성숙한 존재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인생은 완성된 나를 향해 성장해 나가는 여정이며 결국 살아야 하는 이유이자 목적이 된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형상화하고 문학과 인간 사이에는 상동성(Homology)이 존재한다. 공통의 형태를 계승하며 동일하다는 의미다.   사랑은 소통과 자유, 성장이 있을 때 결실을 맺는다. 자라지 않는 나무는 꽃이 피지 않고 열매 맺지 못한다. 사랑은 찬란하지만 파멸의 꽃은 시든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성공신화 파멸 자유 성장 다운증후군 장애아 화랑 대표

2024-08-0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낙장불입, 버린 카드는 잊어라

늪에 빠지면 살려고 발버둥 친다. 배신의 늪은 벗어나기 힘들다. 배신한 사람은 문제 없이 잘 사는데 당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나쁜 인연도 인연이다. 인연(因緣)은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다. 살아 있는 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 하며 사는 사람도 문제지만 교활하고 뒤통수 치는 사람은 멀어질수록 좋다.   막역한 친구가 고심에 빠졌다. 친하던 후배 K가 배신을 때려 인연을 끓을지 말지 고민이다. 대인관계가 원만한 친구는 사람 때문에 속 끓이는 일이 없었다.   친구는 라호야비치에서 태평양이 보이는 화실에서 영혼을 불태우며 그림 그리는 것이 평생의 꿈이였다. 사업과 부동산 정리하고 이사 갈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집 클로징 2시간 전에 바이어가 파토 내는 일이 발생했다.   가구 자동차 등을 보낸 상태라서 어쩔 수 없이 샌디에이고 행 비행기를 탔지만 오동나무에 걸린 신세가 됐다. 이사할 집도 계약이 파기됐다. 우여곡절 끝에 거금의 이사 비용을 두 차례 지급하고 옛집으로 귀향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바이어는 샐러 쪽에서 백아웃 했다고 거짓말을 꾸며댔다. 믿었던 K가 엄청난 손해를 끼친 여자와 오랜 기간 ‘언니, 동생’하며 지내면서 비밀로 둘러댄 걸 뒤늦게 알게 된 친구는 악몽 같은 지난 날이 떠올라 경악했다.   친구가 지독한 상황에서 죽을 힘 다해 버텨온 지난 4년 동안, 모른 채 꾸미고 양쪽에서 이득을 취한 교활함은 놀랍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다. 친구 꼭지를 돌게 한 건 K의 양다리 걸치기와 뻔뻔함이다.   친구는 자신을 도와준 한인회 임원들을 각별하게 챙긴다. 특히 K에게 먹을 것 챙겨주며 살갑게 지냈다. 먹거리를 나눈다는 것은 한솥밥 먹는 식구란 의미다.   ‘낙장불입(落張不入), 버린 카드는 그냥 잊어라’ 친구에게 보낸 위로 문자다. 화투 칠 때 내놓은 패를 물리기 위해 다시 집어 들이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동지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고 친구는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동지가 되고 우정을 나눌 사람이 많다.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제 버릇 개 못 주고, 개 버릇 남 못 준다. 버리는 카드는 잊는 게 상수다.   한 번 금이 간 도자기는 쓸모 없다. 붙여도 물이 샌다. 조롱박은 금이 가면 속을 빼고 말려서 굵은 실로 꿰매서 쌀이나 콩을 퍼 담을 때 사용한다. 금이 간 사람 사이는 다시 붙이기 어렵다. 뒤틀린 사랑과 우정에는 접착제가 없다.     인연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다. 스쳐가는 바람은 그냥 보내면 된다. 인연은 선택이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중요한 선택이다. 선택은 다른 인연에 대한 포기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인간은 인성이나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과 어울린다.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 다섯 명을 살펴보면 참 모습을 알 수 있다.   억울하고 힘들어도 싸우지 않고 적을 이기는 방법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복수의 칼날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피하지도 대응하지도 말고, 그냥 개무시 하면 게임은 끝난다. ‘개무시’는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완전히 알아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원수를 복수로 갚으면 빌미를 제공해 빠져나올 기회를 주게 된다.   버린 카드는 다시 잡지 말고, ‘개무시’만큼 상대를 제압하는 형벌은 없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낙장불입 카드 친구 꼭지 이사 비용 한인회 임원들

2024-07-3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수고하고 일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보수는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말이다. 재주는 어떤 일을 남달리 잘하는 타고난 소질이다. 곰은 훈련만 잘 시키면 재주를 부린다. 왕서방은 재주는 없지만 돈 버는 기술은 안다. 곰 쪽에서 보면 부당하기 그지없다.     타고난 소질과 천부적 재능에 열정과 노력이 합쳐질 경우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능력이 빛을 발한다. 재능은 땅에 묻힌 보석이다. 옥의 원석은 돌조각이다. 장인의 손에 갈고 닦아서 세공을 거쳐 투명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     인류 역사를 바꾼 세계 10대 천재 1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2위는 극작가 세익스피어, 3위는 대문호 괴테, 5위는 미켈란젤로로 꼽힌다. 다빈치는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등 다방면에서 완벽하게 활약한 다중천재(Polymath)다.     1452년 이탈리아의 빈치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다빈치는 부친의 친구인 베로키오 공방에 견습생으로 일하게 된다. 베르키오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소장, 1515년)의 아래 귀퉁이에 천사들을 그렸는데 스승은 깜짝 놀란다. 어린 제자가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사실에 붓을 꺾고 조각에만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두 아기천사의 볼은 둥글고 질감이 살아있는데 예수와 요한의 얼굴은 평면적이고 침침하다.     ‘우리는 이따금씩 자연이 하늘의 기운을 퍼붓듯, 한 사람에게 엄청난 재능이 내리는 것을 본다. 이처럼 감당 못 할 초자연적인 은총이 한 사람에게 집중 되어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예술적 재능을 고루 갖게 되는 일이 없지 않다. (중략) 도저히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이며 미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극찬한 사람은 다빈치다.     다빈치는 37세부터 시작해 약 30년간 중단 없이 5천 쪽 분량의 육필 원고를 남겼다. 내용의 방대함과 깊이로 인해 해설 없이는 읽기 어렵지만 다빈치의 필사본은 불꽃 같은 창의력과 모든 분야에 대한 예술가의 열정을 담고 있다.     1994년 빌 게이츠는 36장짜리 코텍스 해머(Codex Hammer)라 불리는 필사본 노트 한 권을 340억 달러에 구입한다. 다빈치는 자신이 몰두한 개념을 간단한 스케치로 표현하고 깊이 사색하며 창의력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다빈치의 열렬한 팬인 빌 게이츠는 유명화가의 노트 한 권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16세기 낡은 노트에 담긴 다빈치 생각의 틀을 산 것이다.     빌 게이츠도 ‘노트광’으로 유명하다. 착상은 날파리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버린다. 인스프레이션(Inspiration)이 도망가기 전 재빠르게 필기하는 것이 영감을 붙잡는 최선의 방법이다.     재주와 능력이 성공한 삶, 위대한 예술가를 만들지 않는다. 창의력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만나는 새벽별로 반짝인다.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이나 꽃잎 송별도 기록으로 남기면 남은 자의 기억 속에 작은 흔적으로 남는다.     생의 파노라마를 영혼의 무늬로 새길 수 없다 해도 별이 지는 밤, 은하수를 건너 그대 가슴에 사랑은 민들레 홀씨로 퍼져나간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천재 천재 1위 다빈치 생각 천부적 재능

2024-07-2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대의 장밋빛 미래

내일을 믿지 말라. 내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집 곳곳에 칸막이가 쳐진 달력이 오피스와 화실, 부엌에 놓여있다. 매일 해야 할 일, 한 일들을 기록하고 계획한 일들을 촘촘하게 기록해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그 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없으면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달력에서 ‘내일’은 날짜 순서대로 오겠지만 목적과 의지가 없이 맞이하는 내일은 무의미하다. 목숨줄이 붙어 있더러도 희망 없이 사는 사람의 내일은 없다.     ‘일을 끝내고 싶으면 바쁜 사람에게 맡겨라(If you want something done, give it to a busy person)’는 내가 좋아하는 문구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바빠도 일을 끝낼 줄 안다. 게으른 사람은 할까 말까 몇 일을 벼르다가 갖가지 이유를 달면서 제 때에 일을 끝내지 못한다.   ‘쎄 빠지게’ 일하면 능률이 오른다. 능률은 의지와 비례한다. ‘쎄가 빠지게’는 혀가 빠질 정도로 힘들다’는 경상도 사투리다. 혀가 뽑힐 만큼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은어다. 영어로는 ‘I am working my butt off’로 표현한다. 한국사람은 혀가 빠질 정도로 죽자 사자 일하고 미국 사람은 엉덩이가 불티나게 일을 한다.     정말이지 ‘쎄가 빠지게’ 바쁜 한 달을 보냈다. 인생은 늘 사면초과, 엎친 데 덮치고 중요한 순간에 자빠져 코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자숙하며 유배생활 하듯 홀로서기를 즐겼는데 참을성 결핍으로 또 일을 맡게 된 것.     데이튼 지역에서 40년이 넘도록 교회와 한인회 원로로 봉사하던 분이 아들이 사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게 됐다. 성질 급하고 빨리 손 드는 사람이 일거리를 맞는다. 집이 금세 팔리고 이삿날이 임박해져 우리집에서 송별만찬을 준비하기로 했다. 초청장 발송하고 메뉴 정하고 요리준비 등 일사천리로 진행했는데 하필이면 이 때 급한 대형 작품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체면상 파티를 파토 낼 수도 없고 작품 판매를 포기할 수도 없는 입장! 피할 수 없으면 맞딱드려 한판 붙는 수밖에 없다. 달력에 날짜별 시간별로 촘촘하게 기획하고 숨가쁘게 준비했다. 꿩도 먹고 알도 먹게 둘 다 잘 끝이 났다.     무슨 일이든지 무리수를 두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차분히 침착하게 행사를 세밀하게 기획해 준비하면 어려운 일도 한꺼번에 감당할 수 있다.     성공은 단 시간에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다른 노력과 정성, 철두철미한 준비가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그동안 코로나와 비대면 일거리로 서로 얼굴 맞대고 사랑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요리 하느라 손마디가 저렸지만 즐거웠다. 다정한 미소와 따스한 눈길, 까르르 웃는 소리가 사랑의 온기로 퍼진다.     삼만이 아제가 낫으로 깎은 대나무로 빨갛게 익은 홍시를 딸 때처럼 가슴이 펄럭였다. 먹어야 정이 든다. 정은 비둘기처럼 가슴을 파고 든다.     인생에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있다. 해야 할 일만 하면 사는 것이 너무 빡빡하고 힘들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산다고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지 않는다.   어릴 적 줄넘기 할 때 술래가 되기도 했지만 줄에 안 걸리고 뛸 때는 허공을 나는 듯 좋았다. 균형을 잘 맞추면 사는 것이 지루하지 않고 탄력이 붙는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장밋빛 미래 장밋빛 미래 날짜별 시간별 대형 작품제작

2024-07-1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떨림과 감동, 심장이 뛰는 소리

가끔 사는 게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한다. 인생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살게 된다. 무의미하게 사는 것만큼 지루한 인생은 없다.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념 하면 아무 것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포기하고 애착을 갖지 않는 삶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인생은 감동하고, 감동시키는 자가 승리한다. 심장 박동을 치열하게 뛰게 하는 것은 용기와 감동이다. 감동은 떨림이다. 감동은 어떤 난관과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타인과 세계를 끌어안는 힘이다.     감동과 울림, 떨림이 없는 일상은 맹목적인 반복일 뿐이다.     별 거 아닌 인생을 별나게 사는 사람은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캄캄한 밤 반짝이는 별을 헤고, 떠오르는 햇살이 어둠을 지우기 시작하면 희망이란 단어를 가슴에 품는다. 단 하루도 같은 색깔의 물감을 풀지 않는 하늘은 곁을 지나간 수 없는 얼굴들을 파노라마로 펼친다. 새벽달 머리에 이고 영롱하게 맺힌 이슬은 여린 풀잎 사이를 빙그르르 돌며 땅으로 떨어진다.     제일 먼저 손 내미는 바람과 악수하고, 여린 잎새 바르르 떠는 풀잎에 인사하며, 그저께부터 짚을 물어 둥지 만들고 알을 품는 어미새를 지켜본다. 살아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이유 없이 목숨줄 견디는 것은 없다.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중략)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중략) 내 가슴이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도 소중하다. 너를 기다리는 나는, 네가 오지 못해도 너에게로 간다. 기다림의 끈을 묵으면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생명 같은 의미가 되고 꽃이 되고 지친 삶의 매듭을 푸는 열쇠가 된다.   누구인가를 기다리고, 무엇인가 열심히 추구하는 삶은 지루하지 않다. 기다림은 희망의 젖줄이다. 희망은 가슴을 벅차게 한다. 가슴 속에 소용돌이 치는 불꽃을 간직한 사람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요즘 자주 눈물을 흘린다. 눈에 밟히면 마음도 변한다. 꼭꼭 숨겨두고 빗장을 채우고 막아둔 감정의 댐이 무너지고 있는 걸까. 황무지처럼 메말랐던 생의 바다에 단비가 조금씩 내린다. 밤이면 먼 바다가 뒤척이는 아픈 소리가 들린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부터 귀가 밝아지고 가슴이 쿵쿵거리며 뛴다.     나이 들었다고 포기하고, 사는 게 힘들다고 탄식하고, 이제 다 살았다고 체념하면 죽음은 물안개처럼 발등을 적시고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끝이 어딘지 마지막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 모르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두려워하는 건 바보짓이다.     감동은 가슴 떨리는 파도의 아우성이다. ‘임은 뭍같이 까딱 않아도’ 산산조각이 난 사랑을 붙들고 바위는 파도가 흐느끼는 심장의 소리를 듣는다.     밋밋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신바람 나는 도약을 꿈꾸는 일은 얼마나 아찔한 반전인가. 떨림과 감동, 변신 없이 두 손 놓고 떠밀려 갈 수는 없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감동 심장 감동 심장 감동 변신 가슴 애리

202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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