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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템즈강에는 별이 뜬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속엔 별이 뜬다. 세상 어느 곳이든, 멀고 먼 하늘에서도 별이 뜬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뼈마디 저리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이별의 상처로 총 맞은 짐승처럼 울부짖을 때도 고개를 들면 별은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어둠이 먹물처럼 화선지를 적시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별 하나의 사랑을 꿈꾸며 찿아 헤맨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윤동주 ‘서시’중에서.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로 다짐한다.     사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들고, 작별이 돌아올 수 없는 절망의 강이라도, 죽어가는 것들 앞에서 생명은 별빛으로 반짝인다.     삼년 반 동안 투병하던 남편을 얼마 전 떠나 보낸 선배는 해 뜨는 날과 캄캄한 밤, 바람 부는 날이면 잎새에 흔들리는 바람에도 운다. 꽃이 피면 꽃이 예뻐서 울고 꽃잎이 떨어지면 이별의 상흔이 아파 눈물 떨군다.     선배는 55년 전 100달러를 들고 사랑하는 사람 손잡고 이국 땅을 밟았다. 아들 딸 잘 키우고 손자 손녀 재롱 보며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었다.     낮에는 별이 안 보인다. 별은 어두울 때 잘 보인다. 내가 별을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땅끝이나 지구의 저 편에서 누군가 별을 바라본다. 사랑이 암호로 가슴 깊이 새겨지는 것처럼 별은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그대 머리 위에 떠 있다.     어깨동무 하고 보았던 고향마을 동산이나, 박넝쿨 흐드러진 담장에 매달린 박꽃들은 별이 뜨면 다문 입술을 벌리고 아침이 오면 고개를 숙인다.   템즈강에도 별이 뜬다.    템즈강(River Thames)은 영국 런던을 지나가는 강이다. 잉글랜드 남부에 있는 강으로 옥스퍼드, 레딩을 거쳐 영국의 수도 런던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가른 후 북해로 흐른다. 세월을 견딘 템즈강가를 거닐어 본적 없지만 어둠이 대지를 덮고 밤하늘에 별빛이 반짝이면 이국의 연인들은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일 것이다. 단 한 번의 눈 길로 운명처럼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리운 사람들이 사는 곳. 이별과 눈물이 있는 곳에는 어디라도 별이 뜬다. 세느강이든 한강이든 비슬산을 등지고 구비구비 돌던 낙동강에도 별은 뜬다.     별 하나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은 억만리 길, 멀고 먼 타향, 지구의 끝이라 해도, 별 하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국의 땅에서, 사막이든 오아시스든, 지구의 끝이라 해도 별을 가슴에 품고 산다.   우리는 한갓 이름 없는 별이였을까. 추억 속에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었을까. 첫사랑의 뜨거운 키스가 별똥별로 사라진다 해도 사랑이 지나간 밤 하늘은 수 만개 수 억개의 은하수로 반짝인다.     별똥별은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대기 안으로 들어오면서 꼬리를 불태우며 지구로 떨어진다. 목숨도 사랑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별똥별처럼 소행성에서 떨어져 지구로 날아온 작은 티끌이었을까.     어머니는 가시가 무성한 고향집 민둥산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 돌아갈 길이 아득해 묘비에 한글 이름 석자 남기고 이역만리 타국에 잠드신 어머니.     디아스포라는 살아있어도 죽어도 영원한 이방인이다. 어머니 젖줄 새긴 별 하나 가슴에 달고 살면 캄캄한 밤 어느 땅 어느 곳에서도 별을 볼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템즈강 목숨도 사랑 타향 지구 이별과 눈물

2024-04-2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마음이 가는 길

마음에도 길이 있다. 가고 싶은 길, 안 가고 싶은 길. 유년의 감꽃이 흐드러진 골목길, 생각나면 눈물 고이는 아득한 추억의 길, 잊어버리고 싶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는 캄캄한 길,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길, 영원히 지우고 싶은, 기억 속의 슬픈 길, 막혀버린 담장 끝에서 죽음처럼 어둔 골짜기를 헤매던 길.     강물은 흔적 없이 흘러가지만 마음의 길은 돌뿌리로 남아 상처를 덧나게 한다.     사랑이 스쳐간 곳도 흔적이 남는다. 새벽이면 영롱한 이슬 머금고 반짝이지만 무지개 빛 햇살과 한나절 뜨겁게 달구던 태양이 기울면 사랑은 낙엽 되어 뒹군다. 영원을 다짐하던 사랑도 책갈피 속 마른 꽃잎의 흔적으로 남는다.   암수의 눈이 하나씩이라 짝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하는 비익조(比翼鳥), ‘두 그루면서 한 나무로 얽힌’ 연리지(連理枝)의 사랑도 양귀비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도 우정도 믿음도 의리와 목숨까지도 영원한 것은 없다.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의 고통이 제일 아프다. 우정에 금이 가고 신뢰가 허물어지면 공들여 쌓아 올린 믿음의 성벽이 무너진다. 칼에 베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지만 마음에 긁힌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다. 딱지를 떼고 지우고 잊으려 해도 상처 난 마음의 흔적은 수시로 덧난다.     살다 보면 별이 일이 다 생긴다. 믿었던 사람이 양다리 걸치고 다정했던 동료가 등 돌리고 배신 때리는 일이 생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변한다. 어제의 인연에 연연해서 오늘과 내일을 멍들게 하는 선택은 바보짓이다. 상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어둔 길로 잘못 들었으면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면 된다.     말 바꾸기와 권모술수로 이득을 취하고, 평온한 일상에 재를 뿌리며, 타인의 인생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사람과는 잡은 손은 놓는 것이 지혜롭다. 세상에는 겸손하며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   봄 봄이다! 이세상 모든 슬픔과 아픔, 묵은 상처의 흔적들을 지우는 찬란한 계절이다. 뒷마당을 병풍처럼 둘러싼 나무들이 연녹색 잎새들을 가지에 피울 때마다 새들은 새벽부터 합창을 한다. 눈보라 치는 겨울동안 어디서 둥지를 틀고 살았을까. 때지어 동그라미나 포물선을 그리며 혹은 담장에 한 줄로 앉아 합창을 한다. 같은 크기 같은 색깔 비슷한 모양의 새들이 나란히 앉아 재잘거린다.   미국 속담 ‘날개가 같은 새들이 함께 모인다(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는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모인다는 뜻이다.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 나는 도토리 (중략)/ 내가 더 크고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중략) / 크고 윤 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박노해의 ‘도토리 두 알’중에서   믿음과 우정, 참과 거짓의 굴레에서 흐트러진 마음 가다듬고 숲 속 길을 걷는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시인은 참나무가 되기 위해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진다.     갈림길에선 선택이 필요하다. 가질 것인가 버릴 것인가. 지킬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사람이던 물건이건, 사랑이던 우정이건, 덧난 상처를 추스리며 걸어가는 마음의 길은 보잘 것 없는 도토리의 길이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마음 돌뿌리로 남아 어둔 골짜기 권모술수로 이득

2024-04-1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이럴 수가’라고 경악하기에는 소식이 너무 황당했다. 친구로부터 간단하게 상황을 전달 받았는데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엄마가 위독하다”며 “기도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은 뒤 몇시간 만에 ‘돌아가셨다’는 통보를 딸로부터 받은 것.     유명을 달리한 분은 한인회 회장직을 4년 동안 역임한 뒤 지난 해 말 무거운 짐 내려 놓고 첫 손주 돌잔치 하러 올해 초 딸이 사는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났었다.     평소에 정성으로 남을 챙기고 열정적으로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는 분인데 이토록 허망하게 만리타향에서 떠날 줄은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소식을 접한 친구와 한인회 동지들은 벼락 맞은 것처럼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는 증이다.     사인은 패혈증 쇼크사. 패혈증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곰팡이 등 각종 감염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반응이 일어나 장기에 세균이 퍼져 기능 이상이 발생하는 질환이다. 여러 장기로 확산 되면 치사율이 높아지고 기저질환이 있을 경우 혈압저하로 패혈성 쇼크가 동반되며 사망에 이른다.     패혈증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빠르게 진행되는데 치사율은 대략 30%이고 심각한 경우는 50%인데 패혈증 쇼크로 이어질 경우 치사율이 80%까지 증가한다. 발병 후 짧은 시간내에 사망할 수 있어 갑자기 오한이 나거나 고열과 구토, 설사나 두통의 증상이 나타나면 신속히 입원치료 해야 한다. 세계보건 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사망자 5명 중 1명이 패혈증으로 사망한다니 정말 무서운 병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은 알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부분적이거나 제한된 정보 속에서 산다. 편견과 무지, 어리석은 판단으로 그릇된 선택을 한다.     빛과 어둠, 낮과 밤이 번갈아 오듯이 오늘이 내일이 되고 내일은 오늘처럼 아무 일 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착각 속에 산다.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까 내일도 잘 버틸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살아간다.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걸/ 목마름에 지쳐보면 안다/ 물이 생명인걸 (중략) 아파 보면 안다/ 건강이 엄청 큰 재산인 걸/ 잃은 뒤에 안다/ 그것이 참 소중한 걸 (중략)/ 불행해 지면 안다/ 아주 작은 게 행복인 걸/ 죽음이 닥치면 안다/ 내가 세상에 주인인 걸’ - 김홍신의 ‘겪어보면 안다’ 중에서       나이 들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죽음도 삶의 연장선이란 생각을 한다. 죽음과 삶이 크게 차이가 없음을 깨닫는다. 힘든 삶에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죽음의 계곡에서 낙화되어 꽃잎으로 휘날리다가 종국에는 마른 입김으로 흩어진다는 걸.     지난 몇 달 동안 주변에서 투병을 하거나 돌아가신 분들이 계셔서 마음이 울적하다. 슬픔은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사랑의 흔적을 지우며 스멀스멀 번져나간다. ‘겁쟁이는 죽음에 앞서 몇 번이고 죽지만 용감한 사람은 한 번 밖에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 중에서   나는 겁이 많다. 용감해 보이지만 작은 빗방울 소리에도 창 밖을 두리번거리고 바람 불면 지붕이 날라갈까 두렵고 별똥별이 떨어지는 쪽으로 두 손을 모은다. 스티브 잡스는 IT업계에 큰 획을 긋는 인물로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희귀암 발병 등 건강문제로 56세로 사망했다, ‘죽음은 우리 모두의 속명이다.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말이다.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패혈증 쇼크사 한인회 회장직 한인회 동지들

2024-04-0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잔가지 치며 울지 않기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이/ 햇살에 맑게 빛날 때다 (중략) /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정호승의 ‘거미줄’ 중에서   정호승은 또 다른 시 ‘거미’에서 거미줄에 매달려 평생 흘린 자신의 눈물을 본다.     왕거미 한 마리가 눈물을 갉아먹으려고 하다가 아침 햇살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햇살에 반짝이는 눈물은 희망이고 사랑이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거미줄에 걸려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일지 모른다. 잡사에 몰두해 중요한 일은 놓치며 살다가 오동나무에 걸린다. 유혹에 눈이 어두워 사랑의 향기 맡지 못하고, 이별의 눈물 홀로 삼키지 못해 그대 발목을 잡는다. 너무 많이 가지려다 모든 걸 잃고, 오늘을 견디지 못해 내일의 희망에 자물쇠를 채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허우적거리고, 없는 것을 마른 땅에 묻는다.     나무들도 밤이면 운다. 새벽 이슬은 밤새 빛나던 별들이 흘린 눈물이다.   바람이 불면 나무는 잔가지를 흔들며 외로운 손짓을 보낸다. 지난 겨울은 껴안고 있기조차 힘들었다고, 가장 연약한 가지 하나 꺾어 날려 보낸다.     영원히 붙어 함께 사는 것은 없다. 사랑도 욕망도 재물도 후회도 절망까지도 어느날 홀연히 떠나간다.     춘분(春分)이 지난 탓인지 봄을 재촉하는 비가 자주 내린다. 춘분점은 테양이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적도를 통과하는 점이다.     봄 햇살은 따스한데 바람이 많이 분다. ‘2월(음력) 바람에 김치독 깨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죽는다.’는 속담처럼 꽃샘바람이 동짓달 바람처럼 매섭고 차다. 풍신(風神)이 샘이 나서 꽃을 피우지 못하게 바람을 이리저리 몰고 다닌다.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일년 24절기를 꿰고 있는 어머니는 ‘청명에는 부지깽이를 꽂아도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신다. 청명에 심으면 무엇이던 잘 자란다는 뜻이다. 청명은 춘분과 곡우 사이에 있는데 이때쯤이면 어머니는 삼만이 아재와 본격적으로 농사준비에 들어간다.     봄이 오면 어머니는 굽은 등을 더 굽혀 가지를 친다. 앞뜰을 가득 채운 찔레꽃 가지를 정성 들여 자른다. 전지(剪枝)는 나무가 원하는 형태로 자랄 수 있도록 가지를 잘라주고 웃자람을 막고 겉모양을 고르게 하는 일이다. 가지를 잘라내는 아픔이야 없겠냐만은 더 아름답고 튼실하게 자라기 위해 아파도 울지 않는다.     잔 가지를 치면 나무 둥치가 보인다. 뿌리가 튼튼해지고 꽃과 열매가 풍성해진다.     살다 보면 가지를 칠 때가 생긴다. 너무 오래 방치하면 겉과 속이 뒤죽박죽 된다. 군더더기를 없애면 핵심이 보인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면 정작 필요한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가식을 땅에 묻으면 참모습의 꽃을 피운다.     곁가지 잔가지 치고 홀로 눈물 떨구지 않기를, 거미줄에 걸려 퍼득 거리는 것이 사랑이라 해도, 이별 뒤에 오는 빈 잔의 추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잔가지 곁가지 잔가지 춘분과 곡우 청명 곡우

2024-04-0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양파 한 뿌리의 선행

‘옛날 못된 할머니가 살았는데, 죽고 나서 보니 착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악마들은 할머니를 불바다 속에 던져 버렸다. 그래도 이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뭔가 구제할 거리가 없나 곰곰히 생각하다가, 단 하나의 선행을 기억해 내고는 하느님께 고했다. 할머니가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 양파를 가지고 가서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나오게 하라. 만약 불바다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진다면 불바다에 남게 되리라.”     수호천사가 내민 양파를 붙잡고 할머니가 조심조심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다른 죄수들이 할머니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구!” 할머니는 죄인들을 발로 걷어 찼다. 그녀가 이 말을 하기 무섭게 양파는 뚝 끊어져 버리고 할머니는 불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트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물욕과 색욕의 상징인 아버지와 삼형제 그리고 서자인 막내 아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욕망과 구원의 장엄한 대하드라마다.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선과 악,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문학사에 빛나는 거대한 서사시다.   하느님은 ‘양파가 끊어지지 않으면’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양파 한 뿌리는 천국행 보증수표가 아니다. 신의 은총은 수용하는 자의 결단에 따라 달라진다. 천사는 불바다로 떨어진 할머니를 두고 ‘눈물을 흘리면서’ 떠난다. 수호천사가 지옥으로 간 할머니를 구해주려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고통에 대한 연민이다.   여기에는 자업자득,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간의 법칙은 작용하지 않는다. 연민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하늘나라에는 연민이라는 아름다운 법칙이 존재한다. 연민(Compassion)은 고통을 함께 하다는 뜻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 21절 예배당에서만 주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거룩함을 실천하라는 뜻이다. 단테의 지옥에는 여러 가지 죄목들을 저지른 자들이 가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옥은 ‘선행을 한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가게 된다.   ‘단 한 번의 선행’도 하지 않은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양파 한 뿌리’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양파 한 뿌리는 구원과 희망을 단서가 된다.   베드로 전서에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온갖 종류의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라고 적고 있다. 믿는 자는 거룩한 척 하지 말고 생활에서 실천하라는 뜻이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허상이다.   ‘양파 한 뿌리’는 구원에 이르는 참모습이다. 작지만 소중한 믿음이 천국길에 오른다. 할머니는 양파 한 뿌리로 은총을 샀다고 생각했다. 신은 딜을 하지 않는다. 단지 은총을 부여할 뿐이다.     할머니의 가장 큰 죄는, ‘나’와 ‘너희들’ 간에 선을 긋고 자신만이 선택 받았다는 교만과 단절이다. ‘선택 받은 인간’이라는 믿음이 교만이 되지 않도록 영혼이 백합처럼 순수한 부활절 맞으시길!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양파 뿌리 천국행 보증수표 자업자득 인과응보 막내 아들

2024-03-2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불에 그을린 우리집 대들보

서까래가 부서져도 집의 흔적은 남는다. 토네이도나 태풍에 지붕이 날아가도 기둥이 남아있으면 집터를 찿는다. 기둥은 건축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다. 기둥은 지붕의 하중을 받아서 초석(礎石)에 전달하는 수직 구조물이다. 대들보가 수평력을 받는 부재라면 기둥은 수직력으로 지붕을 받친다. 기둥이 기울거나 무너지면 집은 폭삭 내려 앉는 위험에 처한다.   사람 사는 일도 작은 일이 발생해 큰 일로 번져 나간다. 기둥에 나사못이 빠지면 한 쪽이 기울다가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며 와르르 무너진다. 작은 일이 틈새를 비집고 발생하면 큰 일이 벌어질 징조를 보인다.   불운은 ‘헐크(Hulk)’처럼 엄청난 위력과 파괴력으로 덤벼들지 않고 행복한 순간에 봄바람처럼 꽃잎을 흩어지게 한다. 빠져나갈 준비도 맞장 뜰 시간도 주지 않고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한 번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멈추기가 힘들다. 쓰나미처럼 몰려와 순식간에 수많은 것들을 앗아간다.   아버지는 평양과 부산을 오가며 사업을 해 돈을 모았다. 고향에 논과 밭을 사들여 지주가 되고 멋진 집을 짓는 것이 꿈이였다. 아버지의 꿈은 6.25 전쟁으로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다. 몇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지은 집에 하루도 기거하지 못하고 피난길에 오른다. 어머니는 삼년동안 삼시세끼와 참을 챙겨주며 완성된, 꿈에도 그리던 새집이 눈에 밟혀 눈물로 작별했다.   우리집은 낙동강을 끼고 도는 삼거리 요충지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Battle of the Naktong River Defense Line)에서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 사이 치열한 전투를 겪은 지역이다. 북한군들이 마을을 점령한 뒤 신축한 새 집에 진을 치고 부대 본부를 차렸는데 철군하며 불을 질렀다. 어머니는 솟아오르는 불꽃을 보고 후퇴하는 중공군 쪽으로 뛰쳐가려고 했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 집은 다시 지으면 된다.” 아버지가 어머니 손을 잡는다. 이 장면은 수백번 더 들었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 눈엔 닭똥 같은 눈물이 뚝 떨어진다.   우리집 대들보는 불에 그을려 타다 남은 흔적이 있었다. 전쟁 후 아버지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새 집 지을 터를 남겨두고 불에 타다 남은 나무들로 방 두칸짜리 가건물을 지었다. 우물이 우리집 부엌안에 있었던 것도 그 연유다. 전쟁 후 뇌일혈로 쓰러진 아버지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나이 들면 남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꽃 피고 찬란했던 계절 지나고 우수수 낙엽 지는 가을이 오면 예쁘고 아름답던 꽃들도 이름없는 잡초도 말라 시들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사람 사는 모든 것, 죽고 사는 일상이 공평한 것인지 모른다.   미국 속담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세번씩 번갈아 온다’는 말이 있다. 나는 ‘좋은 것들은 세 가지로 온다(Good Things Come In Threes)’에 믿음을 갖는다.   어렵고 힘든 순간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나간다. 부정이 긍정을 몰아낼 수 없다. 토네이도가 무섭고 두려워도 살아만 있으면 살 방도가 생긴다. 지붕과 서까래, 대들보와 천장이 날아가도 집 터만 있으면 기둥을 세우고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우리집 대들보 우리집 대들보 대들보가 수평력 서까래 대들보

2024-03-1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겨울이 봄을 이기지 못한다

세상에는 이길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근시안으로 보면 이기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일이 틀어진다.   봄이 왔다. 봄은 소리소문 없이 온다. 새각시처럼 버선발로 살며시 다가온다. 몇 주 전만해도 폭설이 내리고 온천지가 눈에 덮혀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이토록 찬란한 봄이 오다니! 겨울이 아무리 혹독해도 봄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다. 이별이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는 것처럼.    ‘봄 눈 녹듯이’ 강이 풀리는 소리 들려오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 내린다. 뒷뜰 연못에서 서걱이던 마른 갈대들도 아지랑이를 품으려고 봄볕에 술렁인다. 다시 사랑을 시작할 조짐이 여기 저기 보인다.   ‘봄이면 네가 찿아올까/ 햇살에 눈이 녹듯이 그렇게/(중략) / 어느새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얼었던 내 맘에 꽃이 피어나듯이/ 한눈에 너를 알아볼 거야/ 혹시나 내가 너를 못 알아봐도/ 나를 찾아줘’-한올의 ‘봄날에 만나자’ 중에서   봄은 축복의 손으로 대지를 어루만진다. 생명을 잉태하는 기적을 손 끝마다 매달고 가장 밝고 아름다운 빛깔로 마술의 향연을 벌인다. 어떤 유명한 화가도 현란한 봄을 색깔을 팔레트에 담아내지 못한다. 봄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대지에 펼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세기 2:9).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에덴동산 한가운데 심은, 영원한 삶을 주는 생명수(生命樹)를 가리킨다. Lucas Cranach가 그린 ‘인류의 타락(The Fall of Man)’에는 벌거벗은 채 선악과를 먹는 아담과 이브의 왼쪽에 생명나무가 보인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다시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한다.   눈 깜박할 시간, 나릇한 봄 향기에 취해 잠깐 오수를 즐기는 사이, 봄볕이 앞뜰과 뒷뜰에 생명수(生命水)를 뿌리며 봄의 향연을 펼친다. 열병식 하듯 나란히 줄을 서서 제일 먼저 여린 목을 내민 건 튤립이다. 그 옆에 납작 엎드린 보랏빛 군자란이 기지개를 켠다. 아네모네와 크로커스는 사랑이 뜨거워질 무렵 필 요량이다. 개나리는 가지마다 앙증맞은 입술을 뾰족히 내밀고 사랑의 손길을 기다린다. 초가을에 뿌린 팬지는 ‘사랑의 추억’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감감 무소식이다.   돌보지 않아도 무시로 피는 코스모스는 한더위를 참고 견디며 가을 연가를 부를 채비를 한다. 모진 바람에도 가늘고 긴 목을 깎지 않는 코스모스는 청상에 홀로 되신 어머니를 닮았다. 먼저 핀 꽃들이 정원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을의 길목에서 가는 손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한다.   미움이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 절망이 희망의 싹을 자를 수 없고, 비천함이 고귀함을 따라갈 수 없고, 비굴함이 용기와 대적하지 못한다. 졸부가 최부잣집 곳간을 채울 수 없듯이 무식이 유식을 따라잡지 못한다.   하늘이 땅을 품고, 땅이 하늘을 우러러 꽃은 피고 진다. 삶이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못다한 사연들이 허공에 사라져도, 봄이 오면 새들은 슬프고 아름다운 노랫말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겨울 생명나무 열매 생명 나무 노랫말로 하늘

2024-03-1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누가 내 목에 방울을 달았는가

쓰러지는 때가 다시 일어나는 시간이다. 마냥 자빠져 있을 수는 없다. 털고 일어나려고 너무 용쓰면 망친다. 그만 둘 때를 알면 시작 할 시간을 알게 된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는 것도 나다.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도 내 자신이다. 아무도 나를 절벽으로 내 몰지 않았다. 절벽 끝에 서서 미친 듯 사랑하고, 죽을 만큼 미워하고, 다시 사랑을 꿈꾸던 날들.     사랑이란 단어 속엔 비밀번호가 있다. 독약 같은 사랑의 말들은 세월이 가도 가슴에 못 자국을 남긴다. 총 맞은 것처럼 피투성이가 되어도 사랑은 피해갈 수 없는 집착이다. 심장에 구멍을 뚫고 사랑은 방울소리 울리며 목을 조른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두려워도 낭떠러지 끝에 서면 내려오면 된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홍만종이 지은 문학평론집 ‘순오지(旬五志)’(1687)에 ‘묘항현령(猫項懸鈴)’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순오지’에 의하면 쥐떼들이 모여서 고양이의 피해를 면하려면 무슨 신기한 방법이 없겠느냐고 상의했다. 쥐 한 마리가 “그건 간단한 일이야.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놓으면 고양이가 오는 걸 알 수 있지”라고 한다. 뭇 쥐들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하고 찬성했다. 그러자 늙은 쥐 한 마리가 “그 의견이 좋기는 하지만 누가 그 방울을 달지?”라고 묻는다. 쥐들이 서로서로 눈치만 보고 꽁무니를 뺀다는 설화다.     판본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방울을 집주인에게 보내어 고양이 목에 다는 데 성공했고 쥐들은 평화를 되찾았다는 내용도 있다.     문헌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구전 채록 자료는 찿기 어렵다. 설화 전파에서 문헌이 구전에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어 비교문학적 연구 자료로써 가치가 크다.       외국에도 ‘이솝우화’ 이야기가 있다. ‘이솝 우화’는 고대 그리스에 살던 노예이자 이야기꾼이였던 이솝 아이소프스(Aesop, Aisopos)가 지은 우화모음집을 말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Belling the cat)’는 이솝 우화의 페리 인덱스 613에 실려있는데 중세시대에 추가된 이야기로 알려진다.     우화(寓話)는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담은 이야기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는 ‘행동보다 말이 쉽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의견을 내놓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목에 크고 작은 방울 하나씩 달고 산다. 아름답거나 보기 흉한, 매력적이거나 볼품 없는, 각자의 방울을 목에 걸고 살아간다. 그 방울은 빛나는 장식이 되기도 하고 발목을 잡는 덫이 되기도 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 해도 쥐는 온전히 위험을 피해갈 수 없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 누구를 위해서도 목에 방울을 달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   ‘아무도 없는 빈자리에도/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시공간 안에도/ 누군가는 있었다/ 보내주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항상 누군가는 있었다/ 사랑의 방울을 달고/ 천사처럼 다가오는/ 시공간 안에는/ 달캉달캉 방울 소리가 난다 -김선희의 ‘누군가의 방울 소리’ 중에서   오늘은 내일에 비하면 이미 낡은 것이지만, 운명처럼 목에 걸린 방울을 벗을 용기가 있다면, 어제의 멍에 벗고 소중한 내일을 지킬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방울 방울 소리 이솝 우화 크리스마스 선물

2024-03-0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물들어 온다 배 띄워라

‘만개할 때 꺾어라.’ ‘물들어온다 배 띄워라.’ 화랑 비즈니스 좌우명이다. 한 번 화랑에 발 들여 놓은 고객은 황제 모시듯 정성을 다한다. 그렇다고 납작 엎드려 아부하거나 빌붙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맞선다. 한 쪽이 기울어 상대를 얕잡아 보게 되면 딜은 끝장난다. 주고 받는 악수가 고객과 판매자가 나누는 협상의 시작점이다.     시너지는 강대 강 대치일 때 발생한다. 한 쪽이 한 쪽을 제압해서는 안 된다. 고객의 주머니 깊숙이 숨겨진 투자 금액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 내는 것이 거래를 성사시키는 딜러의 역할이다. 시너지(synergy)는 동반 상승 작용이다. 시너지는 같은 느낌으로 여럿이 뭉쳐 더 큰 힘을 낸다는 뜻이다.     맘에 드는 작품을 좋은 가격에 구매하고 싶은 고객의 니즈(needs)와 욕구를 만족 시켜주는 딜러의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접근이 세일을 성사시킨다.   ‘앞 갯벌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 배 띄워라 배 띄워라 / 썰물은 밀려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중략) 배 세워라 배 세워라 / 일엽편주에 실은 것이 무엇인가 / (중략)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련다. /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무릉도원이 가깝도다. /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세상의 티끌은 얼마나 가렸느냐’-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중에서.   ‘어부사시사’는 어부의 일상을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인간의 존재와 소외, 죽음 등을 전통적인 가사문학의 소리와 리듬에 담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인생에도 배를 띄우는 시간이 있고, 배를 멈추고 신선 놀음을 즐기지만, 세상의 티끌을 가릴 수 없는 생의 아픔을 비켜가지 못한다.   ‘만개할 때 꺾어라’는 화랑 좌우명 두번째다. 그로서리는 필요한 것들을 제 때에 사지만 그림은 우유나 오렌지 주스처럼 다급하지 않다. 딜러는 ‘그림을 사도 그만, 안 사도 그 뿐인’ 고객에게 작품을 구입하는 이유와 좋은 그림을 가까이 두는 것이 얼마나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하게 하는지를 공감하게 하는 사람이다.   ‘ Ready, Willing, Able’의 조건을 갖춘 손님은 중요한 고객이다. 작품 구입 할 준비(Ready)가 돼있고 구매 욕구(Willing)가 충만하며 구매 능력(Able) 있는 고객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에 매료될 수 있도록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두르지 말고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내일 와서 사겠다는 고객은 오지 않는다.     중서부에서 현대미술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화랑을 열게 된 것도 엄청난 실패에서 얻은 몫이다. 유명화가의 동양화 판권으로 카탈로그 제작 및 판매로 미국 가정에 동양화를 걸겠다는 꿈은 박살 났지만 어부지리(漁夫之利)로 화랑을 열게 된다. 전시장 부스를 돌며 유명딜러들과 화가, 미술계의 거목들과 친분을 쌓은 결과다. 사업은 실패하고 돈은 잃었지만 사람을 얻은 셈이다.   인생에도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교차된다. 썰물에 배를 띄울 수 없다. 물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배를 띄우면 순항하기 쉽다. 꽃은 지고 다시 피지만 제 때에 꺾지 않으면 낙화 되어 흩어진다. 기회가 와도 잡지 않으면 물거품이다. 마른 땅에 헤딩 하듯 사는 것이 인생이라 할 지라도 기회는 소리소문 없이 다가온다.   실패와 좌절이 번갈아 앞을 막아도 쓰러지지 않는 나무는 지축을 향해 뿌리내린다. 사는 것이 맨 땅에 헤딩 하듯 마른 땅에 배 띄우는 무모한 반복이라 해도, 물 들어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꽃잎이 피고지는 소리 들을 수 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악수가 고객 화랑 좌우명 화랑 비즈니스

2024-02-2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이 사람을 살린다

동네가 야단법썩이다. 지난 주에 어르신 한 분이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담임 목사님은 병원 진료 및 응급 담당이고 자질구레한 건강관리와 뒤치닥꺼리는 내 몫이다. 할머니는 십여년 전 폐암으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노인촌에 강아지와 혼자 산다. 손이 매운 할아버지가 화랑 잔 일을 도와주신 인연으로 투병 일년 동안 총대를 매고 장례식을 치렀다. 영어 읽기는커녕, 말귀도 못 알아듣는 어르신들이 손짓 몸짓, 눈치로 만리타향에서 생활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할머니 병은 심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으로 응급실에 갔었는데 원인불명으로 퇴원, 다음날부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다. 목을 가누기조차 힘들어 무면허 간호사인 내가 아픈 곳을 만져보면 혈관이 펄떡펄떡 뛰었다. 파스를 붙여달라고 해서 어깨를 살펴보니 울퉁불퉁한 물집이 여러 곳에 돋아나 있다. 고혈압 콜레스테롤 당료 등 노인성 질병의 종합세트 보유자라서 급히 응급실로 직행했는데 대장포진(Shingles)으로 판명 났다.   대상포진은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가 몸 속에 잠복상태로 존재하다가 신체 면역력이 약해지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발병한다. 신경절에 잠복해 있던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신경을 타고 다시 피부로 내려와 염증을 일으키는데 극심한 통증을 동반한다. 출산에 버금가는 고통이라는 것이 경험자들의 진언이다.   항바이러스 치료제와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 투여로 급한 불은 끄고 며칠이 지나자 차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기존에 먹던 여러 가지 약에다 대상포진 약 등을 과다 복용해 위장 장애로 구토가 심해 음식을 드시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전화와 전보(Telegram)보다 더 빠른 게 사람의 입! 문자로 소문이 돌자 앞다투어 건강식 영양 죽 쑤어 오고, 가지각색 채소 갈아오는가 하면 교인들이 번갈아 가며 요리를 보내 먹거리가 넘쳐난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복음 6:3)는 티 안 나게 손과 발, 따뜻한 가슴으로 보살피고 사랑하라는 뜻이다.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은 교회나 종교 단체에 참석하면 외로움도 달래고 소통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는 원래 아프리카 속담인데 1996년 힐러리 클린턴이 ‘It takes a village’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우리는 ‘동네’라는 울타리의 공동체 일원으로 상호의존적 관계를 유지한다. 국적이 같고 고향이 비슷하면 한솥밥을 먹은 형제처럼 살갑게 여겨진다. 이웃 사촌이다. ‘이웃’이란 나란히 또는 가까이 있어서 경계가 서로 붙어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이 사람이다. 우리는 나란히 발 맞추며 살아간다. 서로 기대고 돌보며 산다. 발 딛고 사는 곳이 이국만리 외로운 타향, 황량한 벌판이라도 곁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어 서러움을 삼킨다.   꽃들도 눈길을 주면 잘 자란다. 따스한 눈길 주는 것은 마른 영혼에 햇살을 비추는 일이다. 사랑은 타인을 향하는 관심이다. 마른 장작처럼 굽은 손잡는 것이 사랑이다.     ‘죽으면 썩을 몸, 아껴서 뭐 하노” 하시며 명절이면 밤 세워 약식 강정 동그랑땡 삼색나물 곱게 포장해 손잡아 준 다정한 사람들에게 선물하시던 어머니! ‘병 앞에 장수 없다. 몸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라.’ 어머니 김해연 여사가 늘 하시던 말씀이다. 잘 먹고 건강 챙기란 당부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 대상포진 바이러스 항바이러스 치료제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

2024-02-2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이 사랑답게, 심장의 소리에 갇혀

무엇이 우리를 사람답게 하는가. 건장한 육체와 아름다운 미모, 뛰어난 학식과 품성이 사람의 조건이라면 프리다 칼로의 사랑은 인간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옥이다.     최초로 루브르 박물관에 입성한 중남미 여성작가 프라다 칼로(Frida Khalo, 1907-54)는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멕시코 전통 문화를 결합한 원시적이고 화려한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칼로는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간단스키, 마르셀 뒤샹 등에게 인정받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1970년대 페미니스트의 우상으로 칭송 받는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나무다리 프리다’라는 놀림을 받았지만 칼로는 의사를 꿈꾸던 열 여덟의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남자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 전차와 충돌해 버스 손잡이 철봉이 그녀의 몸을 관통해 복부를 뚫고 국부를 지나 허벅지에 구멍을 내는 대형사고를 당한다.   아홉 달 동안 기브스한 채 천장만 지켜보며 천장에 거울을 매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7번의 척추수술을 포함해 총 35번의 수술을 받으며 기적적으로 걷게 되지만 평생 하반신마비 장애를 안고 살게 된다. ‘꼬리를 내 주고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처럼’ 걸을 때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일생동안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다. 두번째 사고는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칼로의 말이다.   프라다 칼로는 멕시코가 낳은 미술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결혼했다. 디에고는 칼로의 연인이고 영원한 우상이다. 수 없는 여성들과 불륜을 저지르고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애정행각을 벌이지만 디에고에 대한 칼로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아기를 갖고 싶었지만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칼로는 네 번의 유산을 겪으며 미친듯이 그림에 몰두한다. 자신의 고통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는지 모른다.   칼로의 작품세계는 ‘초현실주의’와 ‘멕시코’란 단어로 요약된다. 칼로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143점의 회화 작품 중 55점이 자화상이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필생의 예술적 주제가 자기 자신이고, 스스로 뮤즈와 영감의 원천이 되는, 특별한 예술가와 모델의 삶을 살게 된다.   1944년 작 ‘부서진 기둥’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는 칼로의 슬픔과 고뇌를 처절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황량하게 갈라진 대지를 배경으로 칼로는 여신상처럼 서 있다. 몸의 한 가운데를 도려낸 몸뚱아리 속을 받쳐주는 것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이다. 기둥은 금이 가서 쪼개져 있고 여인은 쇠 때로 몸을 동여 매고 서 있는데 온 몸에는 못이 박혀 있다. 여인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은 화가도 관객도 멈출 수 없는 고뇌로 다가온다.     이 무렵 칼로는 건강이 악화돼 몸을 추스르기 위해 갖가지 재료로 만든 코르셋을 입어야 했다. “디에고, 당신의 두려움과 당신의 고뇌, 당신의 심장 소리에 내가 갇혔음을 느낍니다. 이 모든 광기를 요구한 것은 나였지만….“ 칼로의 고백이다.   사랑은 집착이다. 홀로 치르는 전쟁이다. 과녁을 향해 떠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떠나간 사랑은 피의 흔적으로 남아 창조의 불꽃을 태운다. 예술가는 고통과 고뇌, 생의 처절한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랑이 사랑답게, 지독한 평화의 끝, 지옥 같은 생을 승화시키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생의 곳곳에서 바람결에 흔들린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 심장 심장 소리 거장 디에고 디에고 당신

2024-02-1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나홀로 키를 잰다

나홀로 키를 잰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 때문에 자괴감에 빠진다. 모든 것이 공평하고 높낮이가 없으면 잘 났다는 착각도, 무시 당한다는 비참한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     자괴감은 자신을 낮추고 자책하는 대 비해 우월감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낫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다.     도토리는 키 재기를 안 하지만 사람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키 재기 한다. 네 콩이 크니 내 콩이 크니 하고, 참깨가 길다느니 짧다느니 치수를 잰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에겐 기 죽어 꽁지를 낮추지만, 서로 비슷한 수준이거나 정도가 고만고만 하면 깔고 뭉개서라도 고지 탈환을 꿈꾼다. 졸부는 졸부끼리,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끼리 키 재기 한다. 진짜 부자는 키 잴 필요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부자 티가 난다.   개똥철학의 달인이신 어머니는 오빠가 동네 애들과 싸우면 종아리를 때렸다. “싸움은 위를 쳐다보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배울 것이 있다.”며 끼리끼리, 비슷한 수준끼리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은 쓸모가 없는 시간 낭비라는 깊은 가르침이다.   나이 탓인가. 해가 바뀌자 방송이나 유튜브에 나오는 새해 운수에 귀를 쫑긋 세운다.     마음에 송송 구멍이 난 때문일까. 몇 주째 한파에 눈과 비가 쏟아져 태양 본 적 없어 우울증에 걸렸나. 가슴 떨리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 찬란했던 청춘의 날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절망,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오늘을 지키기도 힘들다는 무기력함, 어떤 사람들에겐 사는 것이 죽는 것만큼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리저리 시작도 꼬리도 없는 불안한 생각에 젖어 새해 한 달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하릴없이 집구석을 돌아다녔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단편소설의 대가 현진건 ‘운수 좋은 날’의 명대사다.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으로 살아가는 김첨지는 열흘 넘게 돈 구경을 못한다. 아프다며 나가지 말라는 아내를 뿌리치고 집을 나선 김첨지는 많은 손님을 받아 큰 돈을 벌지만 내내 불안감에 시달린다. 집에 들어가기 불편해서 선술집에서 친구 만나 술을 마시고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설렁탕 국물을 사 들고 집을 들어서는데 아내는 죽어 있다.     김첨지는 운명에 얽매어 산다. 가난과 질병, 하층계급의 비극적인 삶은 돈으로도 극복이 안 된다. ‘행운의 상승과 함께 불운의 상승’이라는 대립병치구조를 통해 우리들이 가장 행복했던 날에도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는 섬뜩함이 도사리고 있다.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아서 시작조차 두려운 공포에 시달린다. 20년 넘게 쓴 칼럼 정리해 출판사에 보내야 하고, ‘Color is My Life’ 자서전 집필, 전시회 준비도 해야 하는데 한 달째 땅 집고 허우적거린다. 개구리 헤엄치며 아무리 용을 써도 물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내 코가 열자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쓸 것은 많은데 쓰지 못하고, 그릴 것은 많은데 물감을 입히지 못한다. 피노키오처럼 거짓을 입에 달고 살 수 없다.     거인들 앞에 서면 여전히 난장이다. 봉우리가 똑같이 높은 산은 없다. 스스로 키를 잴 시간이 왔는지 모른다. 갈 길이 높고 험한데 멈춰 서서 타인과 키 재기를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더 이상 애창곡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를 부르며 못다한 사랑의 편린을 그리워하지 않겠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도 어디까지 날아가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생각 때문 새해 운수 설렁탕 국물

2024-02-0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촌보다 좋은 이웃

나는 미국이 좋다. 편하다. 낯설고 물 선 이국 땅도 맘 붙이니 덜 외롭다. 고향은 유년의 추억을 실어 나르는 호랑나비다. 호랑나비는 날개가 크고 아름답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꽃밭에 앉아 있는데/ 아니 도대체 왜 한 사람도 /즐겨 찾는 이 하나 없네요 (중략) 하루가 지나가도/ 아무리 기다려도/ 찾는 이도 없는데 왜’-던(DAWN)의 ‘호랑나비’중에서.     맑은 봄날, 황토 길 따라 아른거리던 아지랑이는 내 얼굴을 기억 하고 있을까.   낙동강 하류를 굽이 돌아 옆길로 빠진듯한 냇가에서 해가 비슬산 너머로 빠질 때까지 동무들과 놀았다. 머슴애는 팬티만 입고 여자애들은 내복을 걸치고 물장난을 쳤다. 발바닥이 따끔거릴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백사장은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삼만이 아재가 짚을 꼬아 그네를 묶어준 수양버들은 온 데 간 데 없고 양철 지붕을 얹은 가게는 라면을 판다. 목젖까지 서늘하게 적셔주던 수박을 매달았던 깊고 차갑던 우리집 우물은 콘크리트로 덥힌 지 오래다. 발 뒤꿈치 들고 아! 하고 소리 지르면 우물 속에 어른거리는 내 얼굴이 작은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간절한 만남과 사랑의 실체가 없는 고향은 망연한 그리움일 뿐, 빛 바랜 일기장 속에 유년의 추억은 향수로 흩어진다.     이웃집에 슬픈 일이 발생했다. 그저께 밤, 앞집에 앰뷸런스와 소방차, 경찰차까지 총 출동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슨 일인지 함부로 근접 못하고 옆집 아저씨와 지켜보며 애를 태웠는데 아침에 모시고 살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브라이언 가족은 나의 소중하고 절친인 이웃이다. 친구나 자식보다 더 가깝고 필요한 사람이다. 기계나 컴퓨터는 물론 간단한 살림 도구까지 조립이 불가능한 기계치 몸치로 나는 명성이 자자하다. 아들이 대학간 뒤에는 제 컴퓨터로 원격 조절해 문제를 해결해 주더니 장가가 애 둘 뒷바라지 하느라 제 코가 백자라서 남보다 더 요원한 사이가 됐다.     ‘앓느니 죽는다’는 각오로 홀로서기에 진입, 키 보드 이것저것 함부로 누르며 극한 생존대결의 길로 들어섰다. 근데 심각한 문제 발생! 20년 늙은 사업용 메인 컴퓨터가 폭파(?) 됐다. 그동안 몇 번 죽었다 살았다 하더니 드디어 사망에 이르렀다.   새 컴퓨터 구입해도 문제는 30000여개가 넘는 미술 작품과 30년 묵은 고객 명단, 포토샵과 기타 파일 등등을 복원하는 일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대장정이다.     ‘뒷간에 빠졌다 나와도 장미꽃 향기 난다(fell in the outhouse came out small like roses)’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어록이다. 나의 친절한 이웃 사촌이 컴퓨터 전문가라니! 이틀 만에 새 컴퓨터로 교체하고 모든 파일을 복구 했다. 위기 상황에도 자존심 지키는 것은 필수, “컴맹이라도 난 그림은 잘 그린다”며 작품 두 점을 선물했다. 가는 정이 없으면 주는 정도 사라진다. 초상집은 먹거리가 필요할 것 같아 소문난 요리 집 치킨 윙 50개를 주문 배달했다. 맘씨 좋은 옆집 아저씨는 우리집 드라이브 웨이 눈도 치워준다. 집 앞을 왔다갔다 하면 눈치 채고 두 이웃이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 서툴었던 내 동작도 유연해지고 어눌했던 언어도 미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정 붙이면 모든 것들이 정겨워진다. 내 청춘과 장년을 송두리채 바치고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내가 발 딛고 사는 곳이 나의 고향이다.     이젠 방황하지 않는다. 내 땅 남의 땅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는다. 지구는 둥글고 하나다. 고향은 아련한 추억으로, 그리움은 잘 익은 포도주처럼 달달하게 혀끝을 적신다. 사촌보다 자식(?)보다 더 좋은 이웃을 사랑하며 매일 미국을 배운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촌 이웃 이웃 사촌 우리집 우물 옆집 아저씨

2024-01-3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치열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나이 들면 잊고 살았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새해를 맞아 포도주 잔 부딪힐 사람 없어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슬픔은 뱀처럼 생의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세월이 민들레처럼 후 불면 날아가 버린다 해도 허공에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 가슴에 얹는다. 가슴이 뛴다. 살아있다는 이 작은 축복!     그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이 꽃피는 시간이었다. 옛날 사진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시절이 정말 좋았다는 걸. 얼굴 예쁜 여자는 나이 들어 주름 생기면 못나 보이고, 못생긴 여자는 늙을수록 튼실해서 덜 늙어 보인다. 인생 후반기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마음먹기 따라, 정성들이기에 따라 외모와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나이 들면 모든 게 평준화된다. 비슷한 생각, 같은 사고로 고착된다. 비슷하게 늙어 평준화된다. 인격은 평준화 되지 않는다. 인격은 나이와 상관없이 천차만별 차이가 난다. 인격은 끊임없이 갈고 닦고 연마해야 한다.    괜스레 허무가 가슴뼈 치고 달아나고, 할 일은 많은데 손에 안 잡히고, 영문 없이 부대끼는 날은 벗과 나누는 수다가 정답이다. 하릴없이 맘이 싱숭생숭해 내 코도 석자인데 친구의 말 못할 사연을 듣는다. 모든 일에 적극적인 친구는 여러 단체에서 회장을 역임했는데 자신이 아끼던 단체의 후임 회장이 배신(?)을 때린 것. 친구는 그 때부터 모든 활동을 접고 몇 년 전부터 은둔생활 하다시피 인연을 끊고 지낸다. 잘 잘못을 가리면 누가 옳았던 간에 두 쪽으로 갈라진다며 친구는 전면 후퇴했다.   살다 보면 높은 산도 깎이고 구릉도 채워진다.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로 단합했던 사람들이 꽃다발과 선물 들고 새해 벽두 인사로 친구를 찾아왔다. 회장 할 사람이 없으니 한인회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것. 분노도 노여움도 잘 익은 술처럼 달달해지는 때가 온다. 용서는 하나님이 하는 것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냥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힘 세고 권력을 등에 업는다고 싸움에서 승리하지 않는다. 달려드는 사람과 싸우지 않는 것이 쉽게 이기는 방법이다. 무저항주의를 이길 만큼 상대를 제압하는 무기는 없다. 탑을 쌓기는 오래 걸리지만 무너트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지만 새 술은 새 그릇에 담으면 된다. 한 때는 밥을 나눠 먹던 우정의 민낯을 본다.     중소 도시는 한인회장 맡을 사람이 없어 곤욕을 치른다. 큰 도시는 명함 찍고 한국 정부 인사와 사진 찍는 기쁨이라도 있지만 중소 도시는 명예도 권력도 없이 봉사하는 자리다. 근교 도시들도 회장할 사람 없어 한인회가 임시 휴업,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때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한인회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경비 절약 하느라 화랑 부엌에 솥 걸어 놓고 육개장 냉면 잔치국수 끓여 먹으며 일심동체로 뭉쳐 일하던 동지들이 있어 좋았다. 동지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다. 다시는 그 치열하고 멋진 때로 돌아 갈 수 없다 해도 담담하게 오늘 하루의 빗장을 연다.     한인사회에 만연하는 갈등과 분열은 감투 다툼이고 졸개들의 행진이다. 유사한 혹은 동일한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투쟁한다. 실제로 한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는 적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 타인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내 잘못을 깨우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게 사는 일인지를 안다.     작고 앙증맞은 작은 풀잎 하나도 밟지 않고 내 길을 갈 수 있기를. 눈을 감으면 치열했던 어제의 불꽃이 타올라도, 담담하게 가슴 속 모닥불 지필 성냥을 찿는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무가 가슴뼈 근교 도시들 분노도 노여움도

2024-01-2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감미로운 낭만을 위하여

눈이 온다 또 온다. 얼마나 오래 올 건지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창 밖을 바라본다. 눈이 오면 제 꼬랑지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으려고 마루는 앞마당을 뛰어다녔다. 삼만이 아재는 마당에 수북한 눈을 모아 동네에서 제일 큰 눈사람을 만든다. 옥이언니는 당근으로 코를 만들고 숯덩이로 눈을 그렸다. 손재주가 좋은 아재가 사랑채에 엮어 매단 강냉이를 낫으로 다듬어 입을 만들면 눈사람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강냉이 낱알들이 눈사람의 이빨처럼 햇볕에 반짝였다.   리사는 눈만 오면 윈트 원더랜드(Winter Wonderland)라고 좋아한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담장 아래 쌓여 수정처럼 반짝이는 눈을 보며 손뼉을 친다. 겨울왕국에 나오는 공주가 되어 꿈과 환상의 나라로 빠져든다. 기분 좋은 날은 종이 왕관을 쓰고 엘사가 부른 겨울왕국의 주제곡 ‘Let It Go’를 흥얼거린다. 동생 안나를 위험에 빠뜨리고 마법을 감추며 숨어살던 엘사가 지난날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표방하는 노래다.     ‘Let it go, let it go / Can’t hold it back anymore (중략) / Turn away and slam the door(떨쳐버릴 거야, 떨쳐버릴 거야. 더 이상 감추고 살 순 없어 / (당당하게) 돌아서서 문을 닫아버릴 거야)’ 마법에 걸려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을 향해 부르는 엘사의 노래는 콤플렉스를 감추고 사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면 미래로 갈 수 없다.     온종일 두 뺨이 빨개져서 주먹만 한 눈뭉치로 눈사람 만드는 리사를 보며 오늘 하루 온갖 시름 눈 속에 묻고 나 홀로 낭만(浪漫)에 젖기로 한다.     ‘굿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중략) /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중략) /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 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을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중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콧등이 빨게 지도록 하루 종일 함께 걸은 남학생 생각이 난다. 연모를 눈치챈 친구가 첫눈 오는 날 견우직녀가 만날 까치다리를 놓았다. ‘첫눈 오는 날 경북대 뒷산, 가 보면 누군지 안다.’ 이 쪽지를 가슴에 품고 눈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실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검정색 교모 쓴 얼굴 하얀 그 남학생을 만나러 버스 두 번 갈아타고 쏜살 같이 달려갔다. 그 때는 핸드폰도 없어 연락 불통, 어른들 눈에 띄면 “어린 것들이 공부나 하지”라는 훈계 받는 시절. 뒷산은 황무지처럼 넓었다. 얼굴은 아리송한데 저 멀리 눈밭을 헤치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기루처럼 다가오는 얼굴. 할 말도 없고 물을 말도 없어 그냥 하루 종일 걷기만 했다. 도시의 끝에서 수성못 끝까지 수십 번 걷고 또 걸었다. 드디어 헤어질 시간!  집까지 오자 돌연 물었다. “의대에 합격했는데 해양선을 타고 싶어. 네가 원하면 해양선 안 타고 의대에 갈 거야’라고 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눈치 없는 내 대답! 첫눈 오는 날의 내 첫사랑은 그 길로 파토가 났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남학생은 마도로스가 됐다.   겨울왕국의 안나의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에 울라프는 “괜찮아, 내가 아니까, 사랑은 누군가를 너보다 먼저 두는 거야.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네가 원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놓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 멋진 대답을 했다면 운명이 달라졌을까.   ‘몰라서 걸어온 그길/ 알고는 다시는 못 가 / 아파도 너무나 아파/ 사랑은 또 무슨 사랑’ 윤수현의 노래 ‘꽃길’을 시로 읊으며 눈 내리는 날의 감미로운 낭만을 접는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낭만 아재가 사랑채 남학생 생각 엘사의 노래

2024-01-1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버리는 것도 예술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채우는 것보다 버리기는 더 어렵다. 집안을 찬찬히 돌아보면 필요한 것보다 필요 없는 것들이 더 많다. 냉장고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쌓여 있다. 어느 것부터 먹어 치워야 하나? 눈 뜨면 냉장고 문 열고 노심초사 한다. 먹거리가 널브러져 있으니 다이어트는 물 건너 간 공수표다.     손수 농사를 지으신 어머니는 쌀 한 톨도 귀히 여긴 분이다. 어릴 적부터 먹는 음식 버리면 죄 받는다고 교육받아서 내 그릇에 담긴 먹거리는 날름 해치운다. 그 뿐이랴! 식성도 좋아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며 육해공군 안 가리고 폭풍 흡입한다.   옷장은 백화점과 굿윌스토어를 방불케 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 정리 하는 게 진저리가 나서 ‘또 새 옷 사면 인간이 아니다’라고 맹세 하지만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 나물 캐러 가는 처녀처럼 핑계는 가지각색이다. 입을 옷이 즐비한데 입을 게 마땅하지 않다니 무슨 황당한 소리! 바겐세일이라서 근검 절약을 목표로 구입한 옷들은 여태 딱지도 안 떼고 옷장에서 노려본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쇼핑은 낭비가 아니라 정신건강을 위한 투자라는 개념은 다소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부엌은 불필요한 그릇들이 차고 넘쳐 정리정돈이 안 된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갖고 있자니 보관할 곳이 태 부족이다. 마음 크게 먹고 버리고 난 다음날 꼭 필요하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사는 집이 아수라장이 안 되려면 7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한다는 이웃 어른의 말이 생각난다. 이삿짐을 싸면 자동으로 정리가 된다.    그동안 나름대로 ‘깔끔’을 기치로 집안을 꾸몄는데 이삿짐 싸며 잡동사니 증후군이 의심될 정도로 난장판이다. 새집으로 이사 오며 살아온 인생 정리하듯 왕창 버리고 가구와 살림살이를 자선단체에 기증했다.   버리면 사는 게 가벼워진다. 주변을 둘러 싼 물질과 힘겨루기 하는 대신 영혼의 자유와 편안함과 누릴 수 있다. 보이는 것들에서 해방되면 비어 있는 것들의 실체가 보인다.     환경이 인간 정신의 많은 부분을 지배한다. 쾌적하고 평화로운 환경은 마음의 평온을 준다. 주변이 산만하고 복잡하면 집중해서 몰입하기 힘들다.     ‘적은 것이 풍부한 것이다(Less is more)’라는 로버트 브라우닝(Andrea Del Sarto)의 어록은 미니멀리즘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최소주의 (最小主意)를 의미하는데 단순함에서 우러나는 미(美)를 추구하는 사회 철학 또는 문화•예술적 사조를 말한다. 미니멀리즘이란 용어는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쓰였지만 동양 미술 특유의 예술적 영감인 ‘여백의 미’는 거시적 의미의 미니멀리즘으로 서양 문화를 앞선다. 미니멀리즘은 복잡한 겉치장이나 불필요한 부속에 불과한 표현들을 작품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사물의 본질적인 내용만을 추구한다.     냉장고 음식 버리고, 가구를 심플하게 바꾸고, 스타일을 바꾼다고 인생이 정리되지 않는다. 생활의 때를 벗고, 정신의 혼탁함에서 평온을 얻고, 힘겨운 인연의 고리 끊고, 홀로 서기 해도 외롭지 않는, 마음의 정원에 한 떨기 꽃향기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은 영혼의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다.     ‘완벽함이란, 더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는 생텍쥐베리의 말을 새긴다. 기쁨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즐길 수 있을 때 충만해진다. 버리고 또 버리면 가는 길이 훨씬 가벼워진다. 더 이상 뺄 것 버릴 것이 없는 날에 이르면 나비 되어 자유롭게 나를 수 있지 않을까.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예술 문화 예술적 예술적 영감인 냉장고 음식

2024-01-0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두렵지만, 다시 시작이다

바쁘면 더 빨리 일한다. 눈치 보고 주저할 시간 없다. 할 일이 없을 때보다 일거리가 많을 때 능률이 오른다. 오늘 당장 꼭 해야 할 일거리는 내일로 미룰 수 없다. 죽자 사자 하는 수밖에 없다. 선택지가 한 개뿐일 때는 젖 먹은 힘을 다해 답을 찾는다. 축 늘어져 있으면 고무줄처럼 더 늘어져 꼼짝달싹 하기조차 싫어진다.     나이 들었다고, 은퇴했다고, 직장을 그만 뒀다고, 형편이 안 된다고. 실력이 모자란다고, 시간이 없어 망설이는 사람은 형편이 넉넉하고, 시간 넘치고, 젊고 생기 펄펄해도 가는 세월 붙잡고 원망만 한다.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너무 많다. 시작은 언제나 가능하다.     역사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기록한다.     스페인 정부로부터 ‘대양에서 섬과 본토를 찾아 획득하라’는 임무를 받은 콜럼버스는 세 척의 작은 배의 선단에 120명을 싣고 중국과 극동을 목표로 서쪽으로 항해한다.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동방문화를 접하고 아시아는 매력 있는 새로운 세계로 부상하게 된다. 긴 여정 끝에 컬럼버스는 1492년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상륙하지만 자신이 신대륙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당시 유럽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며 대서양 서쪽 너머로 낭떠러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항해는 무모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컬럼버스의 결단과 용기는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거대한 역사의 시발점이 된다.     터닝포인트는 생의 곳곳에 지뢰처럼 숨어있다가 찬란한 불꽃놀이로 폭죽을 터트린다. 게으르고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낮잠 자며 딴지 걸다가 서론만 대충 읽고 본론은 놓치고 결론은 흐지부지, 두려워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시작을 안 하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앞만 보고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뒷걸음 치다 쥐 잡는 일도 생긴다.   20년째 매주 칼럼을 쓰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다. 자전소설 두 권과 자전에세이 ‘여왕 아니면 집시처럼’이 출간되고 신문사에서 칼럼 권유가 있었다. 책 3권을 낸 것도 기적인데 칼럼이라니! 놀라고 걱정돼서 친하다고 믿었던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단칼에 제압, 경험과 실력, 인지도 부족을 이유로 자기처럼 유명한 작가도 매주 6개월 쓰는 것도 부담 되니까 아예 시작을 말라고 타이르듯 만류했다. 가만히 두면 잘 굴러가는데 누가 발길질 하면 옆으로 튀는 게 나의 큰 장점(?)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시작해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칼럼을 쓴다. 어머님 장례식 날도 수술을 받은 때도 칼럼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칼럼쓰기는 내 인생의 나침반이고 작은 지도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끝을 맺을 것인지 어디쯤에서 돌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매듭을 풀고 인연을 접고 헤어질 결심 하고 새로운 얼굴을 만나는, 허허로운 벌판에서 ‘내일’이라는 단어에 희망을 적는다.   손녀 딸들이 자기 방에 걸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라서 긴장된다. 콩알 만한 것들이 좋아하는 색깔 일일이 나열하고 일곱 색 무지개 위를 나는 핑크색 나비를 꼭 그려달라는, 아주 특별한 주문이다. 나비 그려 본 게 수십년이 넘었다. 부지런히 연습해서 할머니 체면 안 깎이게 명작(?)을 그릴 결심을 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태초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있었다. 당신의 하루가 지친 날의 끝이 아니라 용기 있는 시작이 되기를, 새해 새날은 아주 작은 것들 속에 기쁨이 넘치는 빛나는 날들 되기를 간구합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시작 실력 인지도 칼럼 권유 신대륙 아메리카

2024-01-0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세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떠난다. / 청동의(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 하나의 소리가 되어. /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 청동의 벽에 / ‘역사’를 가두어 놓은 / 칠흑의 감방에서 / 나는 바람을 타고 /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 먹구름이 깔리면 /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 뇌성(雷聲)이 되어 /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박남수의 ‘종소리’     시인의 종소리는 청동의 벽에 갇혀 있다. 종소리는 벽을 뚫고 세상에 울음으로 퍼져 나간다.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으로, ‘하나의 소리’가 되어 세상을 진동시킨다. 역사 속에 갇혀 있었던 시간을 해방시키는, 꼭지 터지는 천둥 소리가 되어 자유를 찾아 푸르름이 되고 웃음이 되고 새가 된다.     유년의 종소리는 즐거웠다. 시작을 재촉하는 종소리도 끝을 알리는 종소리도 모두 좋았다. 선생님이 교무실 앞에 달린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 종을 치며 “얘들아” 하고 부르면 하던 재미있는 놀이를 멈추고 동무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교실로 달려 갔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1984년 이화여대 음대 김메리교수가 유일하게 작사 작곡한 동요다. 유년의 종소리는 청명한 울림으로 시작과 멈춤을 알리며 생의 곳곳을 스며 든다. 시작과 끝은 아련한 반복으로 세월의 종을 울린다.   이젠 아무도 종을 쳐 주지 않는다. 언제 시작을 해야 하는지,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 어느 쯤에서 길고 긴 방황을 끝을 접어야 하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아득한 길 위에서 길을 찾으며 길을 잃고 길을 헤맨다. 또 다시 지난 해의 그 자리에 서있다. 달라지려고, 좀더 나아지려고 애를 썼지만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빈 손으로 바람 앞에 내가 서 있다.   작은 것들이 모여 무리를 이룬다. 태산도 원래는 평지였다. 하나 둘 모여 육지가 되고 바다가 되었다. 우주 기원의 가설인 빅뱅(Big Bang)에 의하면 태초에는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모여 있었다. 물리학자 조르주 르메트르(George Lemaitre)는 ‘최초에 모든 것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있었다. 그 후 폭발이 있었고 하늘이 연기로 가득 찼다’라고 주장한다. 찬란한 불꽃놀이와 엄청난 폭발, 앞이 안 보이는 혼돈 속에 탄생한 우주 속에 한 개의 점으로 인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사라지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사는 우주의 주인공이다. 내가 없으면 그대 사랑도 허공을 맴돈다. 후회와 미련으로 지난 날을 닦달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세월의 끈을 푼다. 묶여 있던 것들을 떠나 보낸다. 그리움의 언덕에는 갈대가 서걱인다. 무겁고 힘든 것들의 매듭을 풀지 않으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세월의 끝자락은 흔들린다. 달력의 마지막 장은 펄럭인다. 유년의 일기장, 빛 바랜 추억 속 얼굴, 작별 담은 그대 편지, 소복 입은 어머니의 무명치마는 바람 앞에 서면 펄럭였다. 마음의 끈 다잡아도 그리움의 빈 칸을 눈물로 채웠던 날들이 바람개비로 허공을 맴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지치면 쉬어가면 된다. 슬픔은 삼키면 약이 된다. 고통은 용기가 되고 절망은 희망의 뿌리가 된다. 아픔은 진주처럼 영롱하고 그리움은 별이 된다.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다. 잠시 멈추고 있을 뿐이다. 시행착오는 반복되고 세월이 연륜을 만든다. 인생 역전 드라마는 아직 방영되지 않았다. 누가 더 잘 사는지, 잘났는지 키 재기 하지 말고, 소중한 내 모습 그대로 세월의 끝자락에 내일의 꿈을 새긴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끝자락 세월 바람개비로 허공 우주 기원 천둥 소리

2023-12-2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오는 길 가는 길, 금의환향 길

‘고향 십년 타관 십년 떠돌아 굽어 돌아 / 오는 길 가는 길에 청춘은 시들었네/ (중략) 구름 십년 물결 십년 세월은 흘러가고 / 울다가 웃어보면 주름은 깊어 가네 / 가신 님이 그리워서 몇 번이나 불렀느냐 / 주막집 처마 밑에 꿈길은 천리만리’ – 황국성 노래 ‘오는 길 가는 길’ 중에서.     오는 길이 쉽지는 않지만 가는 길은 더 어렵다. 돌아가기는 정말 힘들다. 고향을 등질 때는 금의환향(錦衣還鄕) 해서 부모님 모시고 옛이야기 하며 오손도손 살리라 다짐한다.     금의(錦衣)는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옷’인데 출세의 상징이다.     초한전쟁에 승리한 항우는 장안을 정복하고 함양에 입성해 진을 멸망시킨 뒤 고향 팽성으로 수도를 옮기려 한다. 한생이 만류하자 “부귀를 누리는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꼴과 같다”며 한생을 죽이고 팽성으로 천도한다. 이 일은 결국 유방에게 천하를 넘겨주는 계기가 되는데 ‘금의환향’은 출세해서 고향에 돌아간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인생은 두 갈래 길 사이에 존재한다. 세상에 제일 먼저 터트리는 울음 소리는 아기가 태어나는 기쁨의 소리다. 생명으로 우주를 숨쉬며 지구로 오는 길이다. 티끌만한 주저도 없이 이 풍진 세상으로 바람처럼 스며든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축복의 길이다. 세월이 폭풍과 천둥을 몰고 와 상처를 내고 할퀴고 멍들게 한다. 탐스럽던 두 볼에 금을 긋고 검은 머리칼에 싸락눈을 뿌린다.     올해 99세로 긴 피부암 투병 끝에 호스피스 돌봄을 받는 카터 전 대통령이 28일 별세한 부인 로잘린 여사의 추모 예배에 참석했다. 77년 동안 든든한 버팀목이자 정치적 지원군이었던 아내를 보내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민간외교와 사회운동, 해비타트 사랑의 집 짓기 운동 등 활발한 사회 활동으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카터 대통령 하면 제일 먼저 싱글러브 장군이 떠오른다. “5년 이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카터 대통령의 계획은 곧 전쟁의 길로 유도하는 오판”이라고 정면 비판했다가 본국으로 소환돼 전역 당했다. 장군은 주한미군 보급담당 사령관이던 리사 아빠의 직속 상관이다. 그의 반대가 계기가 돼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결국 백지화됐다.   전역 후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별 몇 개를 더 달 수 있었을 텐데”라는 질문에 “내 별 몇 개를 수백만 명의 목숨과 바꿨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용사는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싱글러브 장군은 ‘성공한 삶(Life of Success)과 의미 있는 삶(Life of Significance)’ 중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이다. 어쩌면 오는 길보다 가는 길이 더 중요한 지 모른다. 오는 길이 꽃길이라고 가는 길이 꽃길이 되진 않는다. 걸어온 길, 살아온 길이 험한 자갈밭이라 해도 가슴 속 꽃향기 품은 사람은 고통 속에서도 향기로운 삶을 산다.     어머니는 고향 땅 양지바른 언덕에 묻히기를 바랬지만 우리 동네 공원 묘지에 모셨다. 내 유언장엔 장기기증 등록을 했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화장해서 경치 좋은 곳에 뿌려달라고 적었다. 올 때처럼 가볍게 빈 손으로 가면 바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으리라.   달력 마지막 달 빈칸을 센다. 고향에 돌아갈 꿈을 접고 허무의 신발가게에서 성취한 모든 것들이 재가 된다 해도, 부귀영화의 꿈 내려놓으면 새날 새해는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낙동강 구비 돌아 비슬산 참꽃 따다 입에 물고 접었던 날개 펴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리. 사는 날들이 편안하고 무탈하면 금의환향, 마음은 늘 푸른 고향 땅에 둥지를 튼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금의환향 주한미군 철수계획 금의환향 마음 카터 대통령

2023-12-1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이 꽃피는 겨울 나그네

금이 간 장독으로 장을 담글 수 없다. 장은 모든 음식의 밑간이 된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입동(立冬) 무렵 음력 10월 또는 동짓달이 되면 동네 아낙들이 우리집 부엌에 모여 장 담그기 할 메주를 쑨다. 가마솥에 물을 넉넉히 부어 솥바닥에 눌러 붙지 않게 콩을 삶는데 메주콩 비린내가 나지 않게 한번 불에 올린 솥은 끓어 넘치더라도 뚜껑을 열지 않고 뭉근하게 뜸을 들인다. 탁탁 장작 타는 소리와 타오르는 불길로 내 두 뺨은 홍시처럼 빨갛게 달아오른다. 잘 삶은 콩은 둥글게 빗어 달라붙지 않도록 꾸덕꾸덕해질 때까지 겉말림을 한 뒤 새끼줄로 엮어 통풍이 잘 되는 삼만이 아재 방 천장에 매달아 띄운다.     정월달 날씨 좋고 손이 없는 날, 어머니는 장 담글 준비를 한다. 장 담그는 일은 일년 농사만큼 안주인에겐 중요한 일이다. 장은 가족의 일년 양식이다.     명주보자기로 머리를 싸맨 어머니는 며칠째 병정처럼 줄지어 선 장독들을 아기 머리 감기듯 조심조심 씻는다. 어떤 장독은 내 키보다 크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장독에 햇빛이 닿으면 눈앞에 별사탕이 우르르 쏟아진다.   모든 것은 정성이다. 사랑도 가족도 장 담그는 일도. 사람 사는 모든 것이 정성이다. 허투루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랑은 준만큼 받는다. 안 주면 못 받는다.     오색 찬란한 사랑의 꽃다발도 시들면 향기가 사라진다. 린타나 꽃은 한송이에 여러가지 색깔의 꽃이 핀다. 사랑은 꽃과 같다. 피고 지고 다시 핀다. 거미줄에 걸려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있고 독약을 삼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운명적이다. 빠져 나올 수 없는 덫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황홀하지만 유효 기간이 짧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사랑에 빠지면 곧이 듣는다. 사랑은 환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 눈에 콩깍지가 씌이면 안과에 가도 치료가 불가능하다.     장미라고 똑같은 장미꽃은 아니다. 여러 갈래의 사랑을 노래한다. 장미와 비슷한 ‘리시안 셔스’의 꽃말은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해바라기는 ‘당신만을 바라봅니다’로 ‘일편단심, 동경, 기다림’이다. 올망졸망한 미니 장미는 ‘끝없는 사랑’이다. 빨간 장미는 ‘낭만적인 사랑’이고 핑크 장미는 ‘사랑의 맹세’다. 주황색은 ‘첫사랑의 고백’이고 흰장미는 ‘사랑, 평화, 순결’을 의미하는데 프로포즈용으로 적합하다. 청순하고 고급스러운 카라는 ‘천년의 사랑, 순수, 순결’을 뜻하는데 다섯송이 카라를 바치면 ‘아무리 봐도 당신만한 여자는 없습니다.’라는 순종을 의미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빨강색 튤립은 ‘사랑의 고백’이다. 불행하게도 아무도 내게 튤립을 바친 사람이 없다. 사랑도 자급자족이 되면 족하다. 해마다 튤립 구근을 앞뜰에 심는다. 봄이 오면 사랑을 고백하듯 제일 먼저 목을 내미는 튤립은 여왕처럼 고귀하다. 보라색 튤립은 ‘영원한 사랑’ 분홍은 ‘애정’ 주황은 ‘수줍음과 부끄러움’이다. 이 풍진 세상에 모든 꽃들의 의미를 기억하는 사람은 천재이거나 바보다. 어차피 사랑은 미친 굿판, 신들린 듯 사랑할 때가 가장 매혹적이다.   나는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섞인 꽃다발을 좋아한다. 딸은 생일날이나 명절에 빠짐없이 꽃을 보낸다. 아들은 누나가 보내는 카드에 제 이름 적어 달라고 부탁하는 얌체족이다, 장가 가더니 일장월취, 크리스마스 리스를 매년 보낸다. 솔냄새가 좋아 집안에 걸어놓고 아들 며느리 손주가 그리우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세월이 장 맛을 달달하게 만든다. 며칠 남지 않은 달력의 빈칸에 동그라미 그리며, 사랑의 향기를 바람에 실어 보낸다. 흩어져 다시 돌아오는 계절따라 겨울나그네의 길을 떠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나그네 사랑 사랑 평화 사랑 순수 겨울 나그네

202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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